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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근다

<동행, 마음 휠체어를 타는 사람>

by 세공업자

그림을 그릴 때 쓰는 유성 사인펜에서 냄새가 나는데 이게 건강에 나쁘지 않으냐고 물어온다. 나는 별 이상 없으니 써도 된다고 했다. 형은 그 냄새 때문에 머리가 아프다고 한다. 그럼 연필로 그림을 그리면 어떻냐고 했더니 연필은 먼지가 날려 건강에 안 좋다고 한다. 나는 이번엔 물감으로 해보라고 했더니 물감에서도 냄새가 심하게 나서 머리가 아프다고 한다. 이쯤 되면 욱! 할 수도 있겠지만 오랜 세월 형을 대하다 보니 내공이 많이 생겼다. 형을 내 관점에서 볼 게 아니라 형의 눈높이에서 보면 마치 초등 2, 3학년생 장난 꾸러기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것도 말도 안 되는 때를 쓰고 있는 중이다.


형은 사무직으로 일하는 사람들은 힘이 들지 않는 줄 알고 있다. 현장에서 먼지 날리고 냄새나고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는 것만 힘든 줄 알고 있다. 형은 전자파를 싫어하고 무서워한다. 전자파에 노출되면 어떻게라도 될까 봐 TV도 가까이서 보지 않는다. 나는 사무실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은 하루 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서 일한다고 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몇 년씩 그렇게 일하는 사람들은 전자파에 다 타 죽었겠다고 했더니 그건 또 아닌 것 같다고 한다. 사무직으로 일해도 종이 서류에서 나오는 먼지와 컴퓨터와 프린터에서 나오는 전자파에 노출되고 프린트기와 복사기에서 나오는 미세먼지와 화학물질과 냄새도 건강에 좋지 않지만 병에 걸릴 정도는 아니라고 설명해 준다.

KakaoTalk_20250511_190351401.jpg 네임펜으로 사자성어를 그림(공명정대)

형은 이런 설명들을 잘 들으려 하지 않는다. 아니 귀에 들어오지 않는 듯 자신의 이야기만 늘어놓는다. 형의 관심사는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것들 보다는 오롯이 해를 끼친다는 것들에 맞춰져 있다. 그러니 긍정적인 이야기는 나오기 힘들어 보인다.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근다'는 속담이 있듯 맛있는 장보다는 온통 구더기에만 관심을 갖는 거 같다. 구더기 이야기만 늘어놓고 자신의 생각을 인정해 주길 바란다. 장을 담그기 전에 구더기 생각에 힘들어하다 지쳐 쓰러진다고나 할까! 장은 물건너 간다. 당연한 일인지도 모를 일이다.


형은 자신의 방법대로만 소통하고 싶어 하면서 자신의 생각이 틀릴 수도 있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다. 성장기에 형에게도 좋은 멘토가 있었으면 좀 더 소통하는 방법을 깨우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운 마음이 들기도 한다. 내게도 좋은 멘토가 있었다. 가장 가까이에 있었고 하루 종일 붙어 있기도 하는 시간이 많았던 다름 아닌 형이다. 때론 형의 말도 안 되는 일방적 우김과 완력에 좀 더 단련되고 강해져 생존본능이 생겼는지도 모른다.


형 집에 방문하기로 한 시간이 한참이 지났다. 보통 같으면 오전에 만나 12시 이전에는 점심을 함께 먹는다. 이날은 사정이 있어 형에게 이야기하고 오후 2시가 다 되어 만났다. 형은 식사를 하지 않고 기다리겠다고 했다. 형은 차에 타자마자 잠을 설친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항상 시달리는 형의 세계에만 존재하는 조상택, 김문식이 잠을 못 자게 도청을 한다는 말이다. 형은 잔뜩 흥분되어 어떤 말로도 진정이 되질 않는다. 이럴 땐 우리가 만남을 통해 무엇을 하려 했는지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가까운 마트에 주차를 했다. 그 와중에도 형의 입에서는 자신을 괴롭혔던 사람들에 대한 욕설이 쏟아져 나온다.


마트의 식당가로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음식을 주문하고 형의 이야기를 듣는다. 형의 이야기를 듣고 뛰쳐나가지 않고 버티고 있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내공이다. 이윽고 음식이 나왔다. 형의 손이 바빠진다. 허겁지겁 음식을 먹기 시작하는 형을 보며 안도감이 들었다. 식사를 마치고 곡기가 충전되기 시작하며 형은 안정을 되찾아 갔다. 평소 형의 식사시간은 정확한 루틴을 가지고 있다. 점심은 12시에 먹어야 했는데 나와 제수씨를 기다리다 2시간이나 지나 식사를 하게 된 것이다.


기다리다 배가 고팠다고 말을 하면 될 일을 구더기 같은 짜증을 내기 시작했던 것이다. 배가 얼마나 고팠을까! 우리는 다행히 별일 없이 험난한 과정을 거쳐 장을 담그듯 식사를 하게 되었고 그 덕에 안정을 되찾았다. 형은 2시간을 기다리는 동안 내면 저 밑바닥에 있는 힘을 최대한 끌어내어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형의 상태에서는 대단한 일을 해낸 것과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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