뜬장
우연한 계기로 유기견의 현실을 마주하게 되었다. 버려지고 다치고 상처 입고 다시 버려지는 개의 이야기가, 사람이라고 다를까 하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생명에 대한 존중과 사랑은 사람이라 다르고 동물이라 다르지 않다. 사람으로부터 학대받고 버려진 개들이 다시 사람으로 인해 구조되고 치료받았다. 그 아이러니한 장면을 보며 짓밟히고 상처받는 생명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어디에서부터 이 이야기를 시작할까 망설이다가 거의 모든 유기견의 삶 속에 등장하는, 시보호소나 불법번식장에 갇혀 있는 동물들이 수용되는 '뜬장'이 떠올랐다. 이 생소한 단어가 떠오르자 등줄기가 싸늘해졌다. 영단어에는 뜬장이라는 정확한 단어가 아예 없다. 설명하는 방식의 표현이 있을 뿐이다. 캘리포니아, 메릴랜드 등 미국의 몇몇 주에서는 뜬장을 사용하는 상업적 번식업체를 강하게 규제하거나 아예 금지했다. 철망 바닥의 케이지(elevated wire cages) 사용도 제한하는 법이 생겼다. 다만 여전히 규제가 느슨한 주에서는 쓰는 경우가 있고, 불법 운영되는 강아지 공장(puppy mill)에서는 은밀히 사용되기는 한다. 영국은 동물복지 기준이 까다로운 편이라 번식견을 이런 뜬장 구조에 장기간 가두는 건 불법에 가깝다고 한다. 대신 케널이나 마당을 의무적으로 제공해야 하고, 철망 바닥은 동물학대 요소로 간주된다. 결국 영미권에도 뜬장 같은 구조는 존재했지만 “이제는 동물학대의 상징”으로 여겨져 대부분 금지 또는 규제되고 있다. 국내법으로도 번식장은 허가제이며 뜬장은 법적으로 허용되지 않는다. 그러나 실제는 시보호소에서도 여전히 뜬장을 사용하고 있다.
어쩌면 한 생명이 한 번 들어가면 숨이 끊길 때까지 나오지 못하는 철창일 지도 모른다. 가로 90~120cm, 세로 60~90cm, 높이 60cm 안팎 정도의 작은 철제 케이지 형태로 된 임시 수용소의 작은 공간이다. 마치 곧 안락사로 생명이 마감될 생명체들을 위한 대기실 같다. 시보호소는 동물들을 수용할 공간이 늘 부족하고, 구조의 현실은 싸늘하다. 지원금도 예산도 더 늘지 않았다. 그런 이유로 개를 포함해 수용된 모든 동물들이 공고기간이 지나면 쉽게 안락사로 이어지는 게 현실이다.
그 안에는 많은 눈들이 있다. 불안에 떠는 눈, 공포에 휩싸인 눈, 무기력한 눈, 도움을 청하는 눈, 체념한 눈. 그 많은 눈빛 속에 원망이 없다는 사실이 오래 남았다. 왜 그들은 원망하고 절규하지 않는가. 내가 유기견을 외면하지 못한 건 그 약하고 선한 눈동자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유기견에 관심을 갖고 한 달쯤 지난 때였던 것 같다. 한 유기견 보호단체에 후원을 시작했다. 한 달에 2만 원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정기적으로 후원하는 단체가 늘어나서 한 달에 다섯 건의 이체가 발생했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서는 비정기적으로 수술이 급한 경우나 긴급 이동이 요구되는 경우에 필요한 경비를 보탰다. 실질적으로 사설보호단체는 적은 비용에 기대어 버티고 있다. 도움은 늘 절실하다.
언젠가 아프가니스탄 산모가 극심한 기근 때문에 쌍둥이 중에서 한 아이를 먹여 살리기 위해 다른 한 아이를 포기해야 했다는 뉴스를 읽었다. 생명이 버려지는 이유가 이렇게 단순하고 슬프고 비도덕적이어도 되는가 하는 문제가 화두에 떠오르면서 내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에 환멸을 느꼈다. 버려지는 비극은 생명도 종도, 국경도 가리지 않는다.
한국의 입양 및 유기 관련된 조사에서는 ‘버려진 아이’로 기록되거나 서류가 조작된 정황이 드러났다. 경제적, 사회적 취약성이 배경에 놓인 경우가 많았다. 한 청소년은 친부모가 직접 양육을 포기해 보육원에서 자랐는데 시설에서 모은 돈을 부모가 미성년자인 자녀 명의의 계좌에서 인출, 탈취해 갔다. 이 과정에서 아이는 학업 및 진로와 최소한의 생활 기반마저 포기해야 했다. 국내에서는 "토끼"라는 은어로 불리며, 친권을 행사하지 않은 친부모가 단지 금전적 이익을 위해 아이를 찾아와 통장과 돈을 빼앗는 일이 실제로 벌어지고 있다. 배우자가 혼자 환자를 돌보며 전문적 지원이나 경제적 여건이 부족할 때, 결국 더 이상의 부담을 견딜 수 없어 연명의료를 중단하거나 집에서 임종을 맞이하는 선택을 하는 일도 적지 않다. 이 모든 문제들은 개인의 몫이기도 하지만 빈곤과 복지의 사각지대, 제도적 지원의 한계로 발생하는 비극이기도 하다. 버려지는 건 동물만이 아니었다.
결국 다시, 생명을 어떻게 지켜낼 수 있는가 하는 질문으로 돌아왔다. 내가 이 글을 시작하면서 조사한 바로는 사회적, 법적 제도의 방향은 현재 '어떻게 하면 생명을 학대하고 포기하는 타당한 이유를 보완할 수 있는가'라고 나는 판단했다. 동물이 버틸 수 없는 사회에서 사람은 견딜 수 있는가. 생명에 대한 존엄성이 상실되어 가는 사회의 뒤꼍을 들여다보며 말할 수 없는 죄책감이 방관의 상흔처럼 가슴에 낙인으로 찍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