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저곳을 가도 각자의 색을 뽐내기라도 하듯 과일이며 채소들, 그리고 거리의 단풍들까지 한껏 색 자랑에 빠진 듯하다. 그렇지만 인위적이지도 않고 누구 하나 튀지도 않는다. 하나하나의 색은 강한데 함께 있으면 그렇게 조화로울 수가 없다. 이런 게 자연의 힘인가 싶을 정도로...
난, 가을이 되면 부쩍 시장구경을 즐겨한다. 시장에 가면 왜 그런지 모르게 막 흥이 생긴다. 그리고 요리에 대한 욕심인지, 식재료에 대한 욕심인지 모르게 정신 못 차리며 이것저것을 장바구니에 담아 온다. 생각해 보면 요리보다는 식재료의 욕심이 더 크긴 한 것 같다. 집에 와서야 장 본걸 가지고 '이걸로 뭘 해 먹지' 하며 고민하는 걸 보면 말이다.
'아~~' 이번에도 식재료의 욕심이 도를 넘은 것 같다. 시장에 가서 사 온 과일과 채소들에게 냉장고에 들어갈 자리를 못 찾아 주고 있다. '아~~ 어쩌지!' 당황함에 혼자 냉장고 문만 열었다 닫았다를 수십 번. 결국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재료들을 갈아 주스를 만들기로 결정했다. 며칠 전 선물로 받은 사과도 푸석거려 빨리 못 먹고 냉장고 자리를 꽤 차지하고 있었는데 그것까지 모조리 갈아 버리기로 결정을 내리니 그제야 새로 산 식재료들에게 들어갈 공간이 생겼다. 나는 살짝살짝 거실에 앉아 있는 남편의 눈치를 보며 꽤나 큰 인심이라도 쓰듯 맛있는 주스를 만들어 줄 건데 하며, 묻지도 않는 말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잠시 반성도 했다. 다음부터는 좀 자제하며 사야겠다고....
그렇게 해서 잘해 먹지도 않는 착즙주스를 만들기 시작했다. 사과, 냉동망고, 용과, 당근, 비트, 블루베리, 파인애플 등등 냉장고에서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여러 가지 재료가 착즙기를 통해 갈아져 나왔다. 일단은 색이 너무 예뻤다. 또한 착즙 되어 내려오는 주스의 양이 많아 이걸 이렇게 갈면 안 되겠다 싶어 며칠 두고 마실 수 있도록 히말라야핑크소금 약간과 레몬즙도 넣고 갈았다. 드디어 완성. 일단 내가 먼저 맛을 보았는데 '와~~~'
너무 맛있는 게 아닌가! 나는 자신 있게 남편에게 한 잔을 따라 건넸다. 남편 역시 너무 맛있다며, 역시 너는 뭘 해도 맛있게 한다며 나를 치켜세워주었다. 이게 이럴 것의 메뉴가 아니었는데, 그저 냉장고의 빈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생각지도 않은 메뉴를 만든 것뿐인데 이렇게 훌륭한 작품이 되어주다니! ㅋㅋㅋ~~~
집에 사놓았던 음료용기를 꺼내 와 세척을 했다. 그리고는 착즙해 놓은 주스를 담고 제작해 놓은 스티커도 붙였다. 판매용이 아니더라도 이렇게 스티커까지 붙이면 왠지 근사해 보이기도 하고, 완성도도 있어 보여 나는 가끔 만든 음식에 스티커를 붙여놓곤 한다. 이렇게 마무리를 하고 나니 냉장고 자리를 차지해 천덕꾸러기가 되었던 아이들이 오히려 냉장고 중앙칸에 버젓이 자리 잡고 앉는 주인공으로 바뀌었다. 재료욕심에 이것저것 사 와서는 괜히 요리로 사용하지 않고 모조리 갈아버려 눈치를 봤던 조금 전 나는, 온 데 간데없고 그저 당당하기만 하다.
원래 주스라든가 탄산음료를 좋아라 하지 않아서 착즙 같은 건 잘하지 않았었는데 막상 이렇게 만들어 보니 남편도 좋아하고, 순간순간 꺼내 마시기도 좋고, 자투리 재료도 버려지기 전에 활용할 수 있어 두루두루 괜찮은 저장용 음료메뉴를 찾은 것 같았다. 물론 다른 저장용 음식과는 달리 보관을 아주 오래 할 수는 없지만, 내가 먹어보니 적어도 개별포장해 잘 막아두면 10일 정도는 괜찮아 가끔은 만들어 놓아도 될 메뉴라 생각되었다.
냉장고에 자리가 없다고 버렸으면 어쩔 뻔했을까? 역시 뭐든 어떻게 활용하는가가 중요하다고, 누구이냐 보다는 뭘 하냐가 중요하단 걸 다시금 느낀 날이다.
완성된 주스
아무래도 요거요거~~~ 색도 이쁘고 맛도 좋아 혼자 먹기는 아쉬울 것 같은 생각이 드는데, 누구를 가져다주면 좋아라 할까? 오늘도 괜스레 맘이 싱숭생숭 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