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드득 빗방울이 굵어졌다. 창가에 기대어 한참을 빗소리에 빠져 있다 보니 뜨끈한 국물생각에 발길은 저절로 주방을 향하고 손은 재빠르게 조리도구와 식재료들을 꺼내고 있었다. 아무 말 안 해도 메뉴는 이미 잔치국수로 당첨! 역시 비 오는 날은 진한 육수국물과 함께 후루룩 요란한 소리를 더 할 국수 메뉴가 찐이 아닌가 싶었다.
가스에 두 개의 냄비를 올렸다. 하나는 육수를 끓일 물이고 하나는 소면을 삶아 낼 물이다. 육수물은 이런저런 재료들을 넣어 긴 시간 진한 맛을 우려낼 것이고, 하나는 면을 삶기 위한 맹 물이다. 하지만 면은 한 번에 완성되지 않는다. 후루룩 끓어오르면 찬물을 붓고 다시 열을 가한다. 또 후루룩 끓어오르면 다시 찬물을 부어 끓어올랐던 열을 내린다. 그렇게 하기를 여러 번. 뜨거운 온도차를 견뎌내야만 한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다. 면은 다시 찬물로 들어가 얼음과의 샤워도 여러 차례 반복해야 한다. 남아있는 전분이 차가운 얼음물에 씻겨 내려가야 드디어 국수의 주인공이 된다는 걸 많은 실패를 겪고서야 알게 되었다. 면을 삶아내는 것에 이토록 수고와 정성이 들어가는 줄 음식을 하기 전에는 몰랐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면을 삶다 보니 이 과정이 꼭 우리네 인생사 같이 느껴졌다. 누군가는 육수국물 우려 지듯 한 번의 과정으로 자기의 목표에 도달하는 이도 있고 누군가는 면발이 되는 과정처럼 다 된 것 같은데 다시 처음부터, 다 됐구나 싶으면 또 나락, 이제 정말 마지막이다 하며 온 힘을 다 했더니 생각지도 못한 다른 난관에 부딪히는 우리네 인생사처럼 말이다. 나는 면을 삶다가 이런저런 감정이 들어 눈물도 나고 웃음도 나기 시작했다.
그러다 드는 생각은,
온탕과 냉탕을 오가다 쫄깃한 면발이 되어 한 그릇의 음식 주인공이 되듯 '나에게도 반드시 좋은 결과가 있을 거야' 하는 희망이 생겼다. 포기만 하지 않으면 된다. 뜨꺼워 고통스럽더라도, 시리도록 아프더라도 그것을 반복하다 보면 과정이 경험이 되어 더 나은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한 번에 되는 인생이 부럽겠지만 최후에는 육수가 조연이 되고 면발이 주연이 된 것처럼 우리도 주연의 인생을 살고 있는 날이 올 것이라고 굳게 믿어졌다.
어느새
면도 다 삶아지고 육수도 진하게 우려 졌다. 속도를 더해 야채 몇 가지 볶고, 김치도 볶았다. 너무 익어서 뒷전이 되었던 김치에 들기름을 둘러 볶았더니 고명으로 안성맞춤이 되어 잔치국수를 돋보이게 해 주었다. 비록 한 그릇의 잔치국수였지만 먹으면서 '그래 이거야' 하는 생각이 강해졌다. 살다 보면 어려운 일들이 반복되어 실망스럽고 낙담할 때도 생기지만 포기만 하지 않으면 결국엔 완성되는 그때가 반드시 온다는 것. 그리고 그때엔 생각지도 못했던 다른 것들까지 들러리 되어 나의 결과를 한 껏 빛내 줄 조연이 되어 줄 것이라는!
오늘 쏟아지는 빗소리와 함께 내가 내는 면치기 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 요란하고 경쾌하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