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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발 늦은 분노 3 (마무리)

아니꼬운 것은 아니꼬운  것

by LUDENS Feb 16. 2025

그에게 헤어짐을 통보하자 놀랍게도 Y는 그동안의 태도를 바꿔 거듭 미안하다는 말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가 사실 이별을 원했으나 직접 말하지 못했고, 결국 내 입을 통해 원하는 결과를 얻어낸 비겁함에 대한 미안함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에게 인정욕구가 있다는 둥, 소중한 사람에게 현명하지 못하게 굴었던 것을 후회하고 있다는 둥 의중을 알 수 없는 변명을 늘어놓으며 계속 사과했다. 직전까지 없는 이유로 내가 잘못한 사람이 되었는데, 막상 내가 이별을 통보하자 이제는 그가 잘못한 사람임을 자진하여 계속해서 사과하였다. 나는 무엇이든지 간에 그가 사과할 필요는 없으며, 성인으로서 이별을 받아들이고 그가 행복하게 살기를 바란다고 이야기했다. 하지만 그는 의아할 정도로 사과를 멈추지 않았다. 체념한 나에게는 더 이상 의미 없는 다양한 이야기를 바꿔서 붙여가며 나에게 얼마나 미안한지 되풀이했다. 


다만 이쯤 되었을 때 나는 혼란스러워졌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러한 상황이 발생했는지, 며칠 동안 나는 대체 무엇을 이유로 사과했으며, 그는 이제와 나에게 사과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그에게 "계속해서 미안해하지 않아도 되니 그만하라"고 말했지만, 그는 결국 나의 사랑에 보답할 기회를 달라고 했다. 더욱 혼란스러웠다. 나는 "나에게 보답할 필요도 없고 아무것도 빚진 것이 없으니 그런 마음이라면 더더욱 미안해하지 말라"고 이야기했다. 그는 수많은 자책의 말을 쏟아내며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리고 그 사랑이 얼마나 소중한지 강조하며 잘해보고 싶다는 마음을 호소했다. 


그의 반응은 나에게 반전이었다. 그는 정말 내가 이별을 이야기할 몰랐던 것일까? 나는 며칠을 고민한 끝에 그다시 만나기로 결정했다. 물론, 내가 술을 마실 영어 단어를 섞어 쓰는 버릇어쩔 없다는 조건과 함께. 


그리고 4개월을 만났다. 4개월 동안 Y는 인생 최대의 위기를 겪였고, 나는 그에 곁에 머무르며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그 모든 고비를 넘기고 동안에도 그는 한 번도 나의 행복을 위해 노력하지 않았다. 그리고 결국 그는 나를 떠났다. 


 


그와의 이별이 있은 후 머지않아 다른 모임에서 술자리를 가진 적이 있다. 여느 때와 다르지 않은 술자리에서 나는 영어 단어를 사용했는데, 갑자기 한 남자가 나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해외에서 살아본 적도 없으면서(있다) 영어발음도 좋지 않고 문법도 틀리면서(그렇지 않다), 감히 영어를 쓴다"며, 중생이 사용할 법한 콩글리시의 영어 욕을 써가며 엄청난 흥분과 분노를 쏟아냈다. 나는 살면서 처음 겪는 일이었기에 당황하면서도, 이 상황이 코미디 같은 연출인지 고민했다. 진지한 상황인지, 아니면 술자리에서 무리수를 둔 과한 개그 욕심인지 파악할 시간이 필요했다. 나는 왜 나에게 무례한 언행을 하는지 따지고자 하였지만 그는 계속해서 그 저급한 콩글리시 욕설을 반복하였다. 


나는 몹시 불쾌했지만, 문득 Y가 떠올랐다. 

마치 뒤통수를 얼얼하게 한 대 맞은 듯한 기분이 들었고 한 발, 아니 너무 늦게 깨달았다. 

'아하, Y는 내가 영어를 섞어 쓰는게 꼴 보기 싫었던 거구나.'


비참한 기분이 들었다. 놀랍게도, 그때 나에게 되지도 않는 영어 욕설을 내뱉은 남자보다 Y에게 더욱 큰 분노가 치밀었다.Y는 영어를 섞어서 쓰는 나를 아니꼬워했던 것이었다. 그리고 함께 떠올랐다. "너처럼 공부 잘하는 사람들이 너의 직업밖에 선택하지 못하는 것은 야망이 부족해서가 아닐까?"라고 이야기하던 Y가. 나는 몰랐다. 그가 나의 어떤 부분을 깔아뭉개고 모욕하고 싶어 했다는 사실을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의 내면에 왜곡이 있다는 건 알았지만, 그것이 나를 향해 투사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나는 그에 비하면 너무 순진했고, 세상을 너무 낭만적으로 바라보았던 것일까? 


그는 나와 만나면서도, 나에게 결혼과 출산을 기대했으면서도 내 모습을 못마땅해 했다.  

그리고 나는 황당하게도, 전혀 상관 없는 남자에게 어이없는 욕을 듣고 나서야 이 씁쓸한 사실을 깨달았다. 

구역질이 났다. 나는 시간을 거슬러 지나간 남자들을 떠올렸다. 그때는 이해하지 못했던 일들이 이제야 명확하게 그들의 의도와 결합하여 재정리되었다. 나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동시에 아니꼬워했던 남자들, 나를 깎아내리고 나 스스로를 덜 사랑하게 만들도록 노력했던 그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나는 나의 어리석음에 한탄했다. 그것들을 제 때 깨닫지 못한 것, 그리고 실제로 그들의 비위에 맞추기 위해 나를 우선순위에서 밀어냈던 것이 한스러웠다. 동시에, 나는 그들의 모자람에 분노했다. 자신을 온전히 사랑하지 못했던 그들이, 되려 자신을 사랑해주는 나를 끊임없이 의심하고 시험했던 모습이 더욱 선명해졌다.


내가 이 연재를 시작한 것은, 나의 과거 경험들에 대한 때늦은 분노와 깨달음을 정리하고 앞으로 진정 내가 원하는 삶을 더욱 당당하게 살아가기 위한 다짐이다. 뒷북이지만, 그래도 맘껏 세게 울린 뒤에야 비로소 올바른 박자로 삶을 연주하려는 강한 의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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