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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한발 늦은 분노)

한국인인 주제에 영어를 사용하는 나 

by LUDENS Feb 02. 2025

나는 술을 마시고 조금 알딸딸해진 이후에는 말을 할 때 영어 단어를 조금씩 섞어 쓰는 버릇이 있다. 이는 나의 주사(邪)라고 부른다면 그렇다 할 수도 있고 조금 더 무뎌진 언어 감각에 의해 순간적으로 더 "적절한" 단어가 튀어나오는 일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누군가에게는 비웃길 수 있는 변명 아닌 변명을 구구절절 추가하자면, 일상의 업무와 학업에 있어서 영어를 사용해야만 하는 상황인지라 가끔씩은 특정한 표현을 할 때 영어가 더 적절하고 효율적일 때가 있다. (예를 들어, 내가 상대방으로부터 부당한 상황을 겪고 있음을 토로할 때 "I deserve better!"라고 하면 될 것을 "나는 더 나은 대우를 받을 자격이 있다!"라고 하면 어색하지 않은가? 나는 말의 맛을 살리고 싶은걸! 물론 나의 언어 실력이 미천한 까닭이 더 크겠다.) 더불어 술을 마신 상황에서 종종 튀어나오는 영어 단어에 장난 삼아 놀라움과 경악을 표현하며 재밌어하는 주변 사람들의 반응도 함께 즐겁다. 


굳이 술을 마시지 않아도, 종종 자유롭게 영어 단어를 섞어 사용하는 것은 나의 일상이고, 나의 주변 사람들은 다들 그러려니 하는 나의 언어 습관이라 치부할 수 있겠다. 


내가 잠시 사귀었던 Y는 매일 영어 학습 애플리케이션을 활용하는 루틴을 지녔다. 내가 본 그는 대체로 마음먹은 일을 끝까지 잘 해내는 성향은 아니었지만 유독 그 루틴에는 집착했다. 실제로 집이 아니더라도, 어디에 누구와 있든 밤 10시에서 자정 12시가 되기 전 5분가량 애플리케이션을 실행하여 영어 문장을 따라 했다. 그는 3년가량 하루도 빼지 않고 그 루틴을 지켜왔다고 했고, 나의 판단으로도 그의 듣기와 말하기 실력은 꽤 훌륭했다. 나는 그의 루틴을 통해 그가 영어 학습에 대한 열정이 크고, 영어라는 언어에 꽤 친밀하다는 가정을 멋대로 내렸다. 


Y와 술을 마시다가 별 것 아닌 논쟁이 벌어졌다. 논쟁의 상황에서 나는 목소리를 높이지 않고 침착하게 이성적인 대화를 하려고 했지만 영어 단어를 섞어 쓰는 것은 피할 수가 없었다. 사실 피하려고 애쓰지는 않았다. 그런데 그때 Y는 소리를 버럭 지르며 나에게 위협적으로 말했다. 


"한국말로 해." 


나는 순간적으로 놀랐다. (다시 한번 적자면, 영어로 말을 한 것이 아니라 영어 단어를 섞어서 말했을 뿐이다. 가령 "우리가 살아가면서 감당하기 힘든 pressure가 있을 수 있잖아?" 정도의 문장이었다.) 술을 적당히 마신 상태였고, 당황스러운 마음에 금방 사용했던 영어 단어를 다시 반복해서 말을 이어나가려던 순간 그는 더욱더 크게 소리쳤다. 


"아이 씨, 영어로 말하지 말라니까?"


나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우리가 무슨 대화를 하고 있었는지도 잊어버렸고, 방금 말한 문장에서 애써 그 영어 단어의 사전적 한국어를 머릿속에서 찾아내 어색한 번역투의 말로 정정했다. 그가 화내는 것이 무서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내 무안해졌다. 나는 술을 마시면서 순간적으로 적절한 단어가 생각나지 않아서 그렇기도 하고 대화의 맥락에서 중요한 포인트, 아니 중요한 부분도 아닌데 그렇게 화낼 것은 없지 않냐며 한풀 기가 꺾인 채로 항변했다. 그리고 그의 대답은 싸늘하게 돌아왔다. 


"그러면 술을 마시지 마."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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