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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로까 Jun 11. 2018

안전거리 좀 유지해줘

경찰조사 받을뻔한 사연

브라질 비토리아(Vitória)에서 구아쑤이(Guaçuí)까지 이어지는 230여 km는 왕복 2차선의 구불구불한 산길이다. 길이 막힐 정도로 통행량이 많지는 않지만 각 도시로 물건을 실어 나르는 커다란 화물차가 앞에 가고 있으면 속도가 많이 떨어진다. 브라질 사람들, 느긋하고 여유롭기만 한 줄 알았는데 운전할 때만큼은 한국사람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성격이 급해진다. 커브길에서도, 앞차와의 거리가 좁아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추월을 일삼고 속력을 올린다. 


이런 운전문화에 익숙한 데이빗이 한국에 와서도 그 습관을 고치는 건 쉽지 않아 보인다. 특히 앞차와의 안전거리 따위는 고려대상이 아닌듯하다. 양보하지 않아도 될 상황에서도 다른 차를 다 보내고, 바쁘게 가야 할 상황에서도 보행자는 다 기다려주는 사람이 왜 이렇게 앞차에 바짝 붙여서 운전을 하는지. 좁은 골목을 지나거나 주차를 할 때도 다른 차나 사람들, 설치물 등에 닿을 듯 말 듯 엄청 가까이 지나칠 때면 옆에서 잔소리를 하며 주의를 주지만, 그럴 때마다 그는 농담반 진담반으로 자신의 운전실력이 좋아서 괜찮다며 우쭐대곤 했다. 




지난주, 모르는 번호로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경찰이란다. 가게 앞에 놓은 화분을 깨고 고무나무를 훔쳐갔다는 신고가 들어왔는데 CCTV 영상을 보니 우리 차와 데이빗이 그런 것 같다는 거다. 어머나 세상에. 그동안 그렇게 운전 조심하라고 주의를 줬건만 결국 사고를 쳤구나. 앞뒤 상황은 파악해보지도 않고 난 속으로 데이빗을 원망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미 이 사건의 범인은 데이빗으로 결론을 내고 피해자와 어떻게 합의를 해야 하는지, 벌금은 어떻게 되는지부터 경찰에게 물어보고 있었다. 


그리고 데이빗에게 상황을 물어봤다. 세상 무너진 듯 놀란 나와 달리 차분한 목소리의 그는 자기가 차로 화분을 친 줄 몰랐단다. 그때 취객이 있었는데 그 아저씨가 깨뜨린 줄 알았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CCTV 영상을 보고 싶다고 했다. 


경찰이 데이빗을 찾아가 상황을 물어보고 영상을 보여주며 이야기 한 그 30분 동안 난 벌금은 얼마나 나올지, 자동차 보험으로 처리는 가능할지, 전과 기록이 남는 건 아닌지를 걱정하며 인터넷으로 관련 정보를 탐색했다. 확실한 해결책 없이 친구들에게 하소연하고 위로를 받고 있던 그때 다시 경찰에게 전화가 왔다. 


“CCTV가 멀리 있어서 잘 안보였는데... 그 당시 같이 있었던 사람이 상황을 설명해주었습니다. 매일 그 동네를 어슬렁거리는 취객이 있는데 그날 화분을 깨길래 왜 그러시냐고 했었다네요. 많이 놀라셨을 텐데... 일부러 남편분을 지목한 건 아닌데...” 


데이빗이 한 일이 아니라고 하니 눈물이 왈칵 쏟아져 경찰에게 대답도, 하소연도 제대로 못하고 전화를 끊었다.  

데이빗 왈, 그 CCTV 영상에 우리 차가 등장하지만 화분을 깼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거리도 멀고 화면도 어두워 화분이 잘 안 보이는 데다 영상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보여준 게 아니라 차가 등장하는 부분만 편집한 것이기 때문에 작정하면 데이빗을 범인으로 몰아가기가 충분하다. 


설령 범인이라고 해도 아니라고 박박 우겨야 할 판에 난 제대로 상황 파악도 안 하고 경찰 말부터 믿어버렸다. CCTV에 찍혔다고 하니 이 영상이 빼도 박도 못할 증거라고 생각했지, 이렇게 애매한 영상으로 사람을 몰아갈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던 거다. 증인이 없었다면 지금쯤 경찰 조사받으러 왔다 갔다 하는 복잡한 상황에 시달리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생각만해도 아찔하다.


이제 데이빗도 좀 깨닫고 운전할 때 주의하겠지? 난 눈물까지 흘리며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는데, 데이빗은 한국어도 잘 못 알아듣고 경찰이 와서 얼마나 놀랐을까, 위로해주려 하니 브라질에 이런 말이 있다면 자기는 전혀 걱정하지 않았단다. 

Quem não deve, não teme.
(책임이 없는 사람은 두려워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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