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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 백수, 강제 히키코모리의 삶(1)

by 삐아노


파나마에 오면서 백수가 되었다.




나는 스무 살 때부터 알바를 했다.

옷가게, 편의점, 오○록카페 등

과외를 시작하면서 학부 졸업 후

20대 중반부터는 업으로 삼았다.



통장에 돈이 쌓이는 게 쏠쏠한 재미였다.



파나마 오기 직전, 그러니까 2주 전까지 쉬지 않고 일을 했다.

미친 듯이 일을 하게 된 이유는 가장 먼저

'돈이 있어야 부모에게 정신적 독립이 가능하겠구나'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스스로 힘이 생기려면 경제력이 있어야 했다.



일은 힘들기도 했지만 나의 자긍심이기도 했다.

일하면서 대학원도 두 군데나 다녔다.



처음엔 면허가 없어서 몇 년을 뚜벅이로 다녔다.

버스 시간 보면서 뛰어다니는 게 일상이었다.

다음 집에 늦을까 봐 하염없이 뛰고 조금이라도 늦음 죄송하다 사죄 연락을 줄줄이 해야 했다.


시간을 맞춰가야 해서

조금이라도 일찍 도착하면 추위를 피하기 위해

아파트 계단에 앉아있곤 했다.

근데 한 번은 아파트 주민이 나오다가 놀라는 모습을 보고

그 뒤로 계단에 앉아있지 않고 근처를 빙빙 돌았다.



겨울엔 롱패딩에 털부츠로 무장을 했지만

수업을 돌고 집에 오면 다리가 너무너무 차가워서

이불속에서 몇 시간을 녹여도

계속 시렸던 기억이 난다.

여름도 마찬가지.

땀을 뻘뻘 흘리다가 버스에서 겨우 숨을 돌리곤 했다.



왜 면허를 미리 안 딴 건지 후회가 들 무렵,

짬을 내서 운전면허를 땄다.



차를 타니 신세계였다.

그동안 대체 어찌 다닌 걸까!

상황이 훨씬 나았지만

수업이 몰린 날은 1분 단위로 바쁘게 움직였고

다음 날 아침부터 밤까지 수업이 있는 날은 전날 밤부터 스트레스로 고통스러웠다.

과외의 특성상 벌 수 있을 때 벌어야 한다 싶어서 견디면서 했다.


어느 날은

생리가 시작되었는데 생리대를 사러 갈 시간조차 없어서 중간의 학생 집에서 대충 휴지로 대곤 했다.

다 끝나고 집에 오면 숨이 차올라서 피곤이 머리끝까지 찼다.




왜 이리 길게 쓰는가 하니-

파나마에 오면서 당연히도, 강제로 백수가 되었다.



처음에 와서는 집 고치고 치우고 닦고 정신이 없었지만

차츰 안정이 되고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고 난 후였다.



어느 순간 날 보니

나는 딱 그거였다.

라푼젤 탑에 갇힌 휴먼.

왕자 없는 신데렐라.



평일엔 밖에 나가지 않은 적이 많았다.

집 바로 밑에 슈퍼가 있는데

거기 장 보러 10분 정도 나갔다 오는 게 외출의 끝이었다.

그때 왜 그리 안 나갔나 생각해 보면

위험해서라는 이유도 컸고

(매일 살인 기사가 뜨는 뉴스)

물가가 너무 비싸서 돈을 쓰고 싶지 않은 것도 컸고

뭐가 있는지 잘 몰라서 라는 이유도 있었던 거 같다.



물론 나름! 뭔가 했던 건 많았다.

콩쿠르 심사도 했지

논문도 좀 썼지

작곡도 시작했지

음원도 발매했지

운동도 계속했지

언어공부하려고 사이버대 원서도 썼지

수업 홍보도 했지

호텔과 병원들한테 연주자 지원 메일도 보냈지




원래는 가장 먼저 현지 대학을 다니고 싶었는데

박사과정도 없었거니와

클래식 음악의 수준은 낮았고

다른 전공 학사로 들어가자니

언어가 안되어서 무리였다.

(다른 미국 대학 분교도 몇 군데 있지만 과가 전~혀 관련이 없으며 매우 비싸다.)




강제성이 완전히 사라졌으니

하루 종일 집에서 혼자

청소 빨래 요리 등 집안일을 하고

남는 시간에는 주로

유튜브를 계속 보게 되었다.



나도 나가서 수업하고 돈 벌고 싶은데

여기서 아무 의미 없이 집에 갇혀서 요리랑 청소나 하고 젊음을 죽이고 있단 생각에 우울해져 갔다.




갠적으로 SNS도 당연히 그렇지만 유튜브도 정신 건강에 안 좋은 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한다.

영상 그 자체보다는 댓글이.

(우울감 있는 분들 인터넷을 끊어보시는 거 추천!)



집에 갇힌 채 소파에 누워

남을 비난하고 작은 흠을 찾아서 비하하고

모독하고 까내리고 저주하고 즐기는 댓글들을 보니

점차 정신이 피폐해져 가는 기분이었다.



뭔가 뭐랄까.

현실에서 아무도 나에게 뭐라 한 사람이 없으나

일명 개꿀빠는 주재원 와이프.

나도 지루해보고 싶다

돈 안 벌어도 된다니 부럽다 등등



뭐 이런 말들로 스스로 나를 검열하고 비난하고 있었다.

나 혼자 머릿속에서 가상의 인물들에게

해명을 하고 있는 거다.


'나 그간 열심히 일하고 저축해서 돈 많이 모아놨어.. 여기와 서도 투자해서 벌어놨어. 놀지 않고 이것저것 하고 있고. 미래를 위해서 열심히 노력하고 있어. 돈도 안 쓰고 아끼고 있어. 나도 여기 있기 싫어! 돈 벌고 싶다고!'


라고 혼자 논쟁을 펼치고 있었다.

(요새는 그렇지 않다. 생각이 많이 변화했다!)



예전에

어떤 사람이 내 유튜브 영상 댓글에

"부럽다. 한강이 보이는 집에서 마음껏 피아노 치는 삶"이라고 달아서 '?' 했던 적이 있다.


1. 한강 아니고(산다면 부럽긴 하다 하하)

2. 피아노 마냥 즐기는 거 아닙니다

이 곡 만들고 이렇게 치기까지

얼마나 고생했는 줄 아나요


라고 해명하고 싶었으나 그냥 지웠다.



어쨌든-

놀고 있단 소리를 듣기 싫어서 1집 앨범발매를 미친 듯이 열심히 했던 이유도 있었다.




그리고 남편은 너무 바빴다.

아침 6시 반부터 밤 12시 반까지 일했다.

토요일엔 새벽 골프를 치고 모자란 잠을 자느라 저녁 7시에 일어나곤 했다.

일요일에도 피곤해서 종일 누워있고 저녁엔 한국이 아침이 되니 또 일을 했다.

내가 일을 반 해주고 싶었다. 정말로.



어쨌든 그러다 보니 부부간 이야기할 시간도 거의 없고

부부의 밸런스가 완벽하게 무너진 상황이었다.


내가 일할 테니 회사에 취직시켜 달라고도 했다.

불법이란다.



참, 남편 외에 딱히 만나는 사람도 없었다.



한몇 달을 그리 지내다가

안 되겠다! 변화가 필요하겠다!라는 생각이 들어

실천에 옮기기 시작했다.



잘보시면 도마뱀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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