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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용진 Oct 04. 2024

20. 여자에겐 김중배의 다이아몬드 반지도 사랑이다.

ㅡ부그로의 <사랑과 부 사이에서 망설이는 여인>


여자: ‘사랑을 하면서 돈이 없다는 건 참 불쌍한 일이다.

보고 싶은 걸 못 보고 먹고 싶은 걸 못 먹는다면

젊은 날이 너무 비참해지지 않을까.

라면만 먹고 행복할 수 있다는 건 

사랑을 모르는 사람들이 하는 말이다.’ 


남자: ‘돈이 없다는 건 사랑을 시험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상대가 어렵더라도 같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행복하고

더 힘든 시간도 함께 헤쳐나갈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젊은 날의 사랑은 사랑만으로 행복해야 한다.’ 


'이프로 부족한' 사랑과 황금 사이

긴 계단에 연인으로 보이는 남녀가 떨어져 앉아 있다. 서로 다투었는지 연인 사이에 메마른 바람이 지나간다.

침묵을 깨고 여자가 한숨을 쉬며 쓸쓸하게 말한다.  ‘여자에겐 김중배의 다이아몬드 반지도 사랑이야.’ 이에 여자 보다 몇 계단 위에 앉아 있던 남자가 속이 타는지 음료수를 마시며 맞받아친다. '가난하지만 이수일의 따뜻한 가슴이 진짜 사랑이야.’ 


20년 전, 화제를 일으켰던  ‘이프로 부족한’ 한 음료 광고의 영상이다. 사랑을 하면서도 돈에 엉켜버린 연인의 이야기를 소재로 삼았다. 이 영상에서 여자가 말하는 '김중배'는 누구이고, 남자가 이야기하는 '이수일'은 어떤 사람일까? 


지금 세대는 '누구 이름인가'하며 고개를 갸우뚱하겠지만,  ‘손수건 없이는 볼 수 없는’  유명한 신파극 <이수일과 심순애>에 등장하는 인물들이다.  이 비극은 일본의《금색야차(金色夜叉》를 극화한 것으로, 《금색야차》는 1897년부터 5년 동안 《요미우리신문》에 연재된 오자키 고요의 소설이다. 일제강점기인 1913년, 소설가 조중환(1863~1944)이   《장한몽(長恨夢)》이라는 제목으로 번안하였다.  당시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연재되어 화제가 낳았고, 후에 신파극으로 제작되어 큰 인기를 끌었다. 


사랑을 따르자니 돈에 울고, 돈을 따르자니 사랑이 울고

부모를 잃고 아버지의 친구 집에서 살던 고학생 이수일은 심순애라는 여인과 미래를 약속한다. 하지만 심순애는 그녀에게 매혹된 대부호의 아들 김중배의 재력에 마음이 흔들린다. 

“사랑을 따르자니 돈이 울고, 돈을 따르자니 사랑이 울고”, 그 사이에서 고민하던 그녀는 결국 김중배의 ‘다이아몬드 반지’를 선택한다. 사랑을 잃은 이수일은  돈에 대한 울분으로 피도 눈물도 없는 고리대금업자가 된다.

세월이 흘러 심순애는 다시 돌아오지만, 이수일은 차갑게 뿌리친다. 낙심에 빠진 심순애는 속죄한다는 의미로 대동강에 몸을 던지고, 이수일의 친구 백낙관이 그녀를 구한다. 백낙관은 두 사람을 이어주려 혼신을 다한다. 두 사람은 마침내 예전의 앙금을 털고 다시 사랑을 키워간다. 


다이아몬드의 광채가 재력의 상징이 된 것은 언제부터일까? 인류가 수렵활동으로 생계를 이어갔던 동굴에서 나와 터를 잡고 농사를 짓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이때부터 인간은 ‘김중배의 다이아몬드’에 흔들리기 시작했다. 튼튼하고 아늑한 집, 먹거리 걱정이 없는 여유로운 생활을 향유하면서  배우자의 경제력은 곧 생존의 필수요소가 되었다.

하여  ‘사랑이냐, 황금이냐’에 대한 낡고 뻔한 질문은 지금 이 시간까지, 아니 지구가 자전을 멈출 때까지 계속 제기될 것이다.

여행 중에 우연히 만난 그림에서도 이수일과 심순애 그리고 김중배를 볼 수 있었다. 


윌리엄 아돌프 부그너 , <사랑과 부 사이에서 망설이는 여인 >, 1869, 캔버스에 유채, 개인소장


선택의 귀로에 선 여인의 초상

화면 중앙에 젊은 여인이 새초롬한 표정을 하고 앉아있다. 웃는 여자는 다 예쁜 법인데, 그녀의 얼굴에서는 웃음기라곤 한 점도 찾아볼 수 없다. 왜 그럴까? 답은 주변에 있다. 여인의 양 옆에 실랑이를 벌이는 남자들 때문에, 선택의 귀로에서 갈등하는 젊은 여인의 표정이 어둡기만 한 것 같다. 


프랑스의 대표적인 화가인 윌리엄 아돌프 부그로(1825~ 1905년)의 작품 <사랑과 부 사이에서의 망설이는 여인>이다. 때로는 너무도 완벽한 피사체를 볼 때 마음이 차가워지는 경우가 있는데, 부그로의 작품이 그렇다. 

평생 작업실에서 그림을 그린 부그로는 프랑스 아카데미 최고의 화가였다. 붓을 든 80년 동안 무려 822점의 작품을 남겼다. 작품의 특징은 대리석처럼 매끄러운 우윳빛 피부와 보기 좋게 균형 잡힌 몸매, 조각 같은 이목구비를 갖춘 여인들의 등장이다. 특히 그가 묘사한 신화 속의 여신들은 살아 숨 쉬는 듯 사실적이어서 감탄을 자아낸다.



여인의 오른쪽에는 또래로 보이는 미소년이 그녀를 향해 서 있다. 여유로운 미소를 머금은 손에는 악기가 들려 있다. 다른 손은 자신의 진정한 사랑을 알아달라는 듯 심장을 가리킨다. ‘진정으로 당신만을 사랑합니다. 당신이 제 신부가 되어주신다면,  매일밤 달콤한  세레나데를 불러드리겠어요. 영원히.’라고 고백하는 듯하다. 그런데 청년의 미소가 진중하지 않다. ‘영원한 사랑’을 약속하기에는 금방 사라질 듯 가벼워 보인다.

그녀의 왼편에는 이제 노년에 들어선 사내가 그녀를 향해 서 있다. 목에 걸친 굵은 금목걸이와 몸에 두른 모피로 한껏 자신의 부를 과시한다. 한 손에는 진주목걸이를, 다른 손에는 보석함을 들었다. ‘이 모든 게 다 네 거야.’라는 듯 그녀에게 ‘영원한 부’를 약속하고 있다. 그녀를  유혹하는 사내의 표정은 '산전수전'에 '공중전'까지 겪어, 닳고 닳은 듯 교활해 보이기까지 하다. 사내의 손에 주름이 보이지 않는 걸 보니, 평생 궂은일이라고는 해보지 않은 모양이다. 


살짝 기운 포즈에 스민 '그녀의 속내'

화가 부그로는 두 남자 중 어느 쪽이었을까? 후자가 아니었을까? 회화의 보수적 가치관을 중시했던 시기의 화가로, 부와 명성을 거머쥔 그였다. 그럼에도 같은 시기에  등장한 인상파 화가들과 팽팽하게  대립하였다. 새로운 화법을 추구한 인상파 화가들은 당시 아카데미즘을 이끌었던 부그로를 공격하며 새 시대의 주역으로 주목을 받았다.

세월이 흐르면서 미술관은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으로 도배가 되기 시작한다. 반면에 하늘을 찌를 듯이 높았던 마지막 신고전주의 화가 부그로의 이름은 생소해지기에 이른다.

인간이 범접하기 어려운 듯한, 성스러운 그림을 그렸던 그의 작품 중에서 흔치 않은 내용을  연출한 그림이 <사랑과 부 사이에서 망설이는 여인>이다. 


여인의 얼굴은 수심으로 가득해 금방이라도 울 것만 같다. 부와 사랑(혹은 젊음) 사이에서 갈등하며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그녀. 하지만 그녀의 몸은 이미 ‘김중배의 다이아몬드 반지' 쪽으로 기울어 있다. 언제 변할지 모르는 사랑에 자신의 젊음을 베팅하기에는 미심쩍어서일까? 깍지를 지어 무릎에 얹은 두 손에 불안이 묻어 있다. 


사랑은 달콤하지만 그 감정은 언제 증발할지 모른다. 그에 비해 부는 때로는 비정하지만 강한 힘을 지니고 있다. 어느 쪽을 선택한다 해도 누가 그녀를 비난할 수 있을까? 

‘김중배의 다이아몬드 반지가 그렇게도 좋더란 말이냐.’라는 이수일의 원망 가득한 질문에 심순애는 부인하지 못했다. 곰곰 생각해 보면, 김중배도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방법으로 마음을 내보였을 것이다.

100년이 흐른 지금, ‘사랑을 택하자니 돈이 울고, 돈을 택하자니 사랑이 우는’  극단적인 상황은 이제 균형을 찾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한다면, 단단한 각오도 필요할 것이다.


사랑으로 더 영롱한  '다이아 반지'

2년 전의 일이다. 큰 딸아이가 남자친구에게 프러포즈를 받았다며 반지를 보여 주었다. 딸 또래의 결혼 적령기에 있는 여자들에게 동경과 선망의 아이콘이 민트색 박스 안에 들어있는 다이아몬드 반지인데, 프러포즈 반지가 그것이었다. 알도 제법 컸다.

지금은 사위가 되었지만  딸의 남자친구는  ‘김중배’로 태어나지 않았다. 가정 형편이 어려웠던 그는 어린 나이에 여러 일을 하며 성실하게 차곡차곡 돈을 모았다. 그것도 부모에게 매달 적지 않은 생활비를 드리면서 말이다.

작은 돈도 소중히 여기는 착실한 청년이 딸을 위해서 큰 사랑의 표현을 한 것이다. 그 친구의 사정을 알고 있던 터였기에,  반지를 보는 순간 뭉클함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딸아이의 어깨에 손을 얹은 내 목소리는 젖어 있었다. 

“만약 결혼을 한다면, 넌 최선을 다해 사랑해라. 그 아이가 너를 얼마나 소중히 여기는지 반지가 다 이야기해 주네.”

눈에 살짝 맺힌 눈물 때문에 반지가 흐려졌다 반짝반짝 보였다 했다. 차갑지만 영롱한 다이아몬드 빛은 따뜻한 사랑으로 더욱 눈부셨다. 





<함께 듣는 곡 >

 Diamonds are a girl's Best Friends 다이아몬드는 여자의 최고의 친구 (영화 <신사는 금발을 좋아해> OST) 

ㅡ마릴린 몬로 


Man grow cold as girls grow old

And we all lose our charms in the end

But square-cut or pear-shaped

These rocks don't lose their shape

Diamonds are a girl's best friend   


여자가 나이가 들면 남자들은 냉정해져요. 

결국 우리는 모두 매력을 잃어버리게 되지요. 

하지만 사각형이든 물방울 모양이든 

이 보석들은 절대 변하지 않아요.

다이아몬드야말로 여자의 최고의 친구랍니다. 


심순애나, 사랑과 부에 갈등하던 여인의 내면은 이렇게 노래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사랑은 밥 먹여주지 않고, 내 외모를 찬양하던 사람들도 세월이 가면 변심할 것이며, 결국 남는 건 나를 지킬 실질적인 다이아몬드(재산)라는 것, 사랑보다 변하지 않는 가치를 믿으라고요. 

이 노래는 뮤지컬 영화인  <신사는 금발을 좋아해>(1953년작)에서 쇼걸인 로렐라이(마릴린 몬로 분)가 무대에서 부르는 곡입니다.

세기의  연인 마릴린 몬로가 큰 언니가 되어 세상의 모든 여자들에게 충고합니다. 그녀의 영리하면서도 현실적인 조언에 귀가 솔깃해지면서도 마음 한 켠은 씁쓸합니다.

‘영원한 사랑’은 진정 판타지일까요?

나이가 들어 머리와 어깨, 무릎, 발 등이 아프지 않은 데가 없고 모아둔 ‘다이아몬드’도 없지만, 속는 셈 치고  어디엔가  ‘영원한 사랑’은 있다고 믿어보고  싶습니다. 철드는 건 다음 생에서나 생각해 보렵니다. 


P.S  참, 요즘엔 다이아몬드보다는 금이 최고랍니다! ㅋ


https://youtu.be/Ej4c5wUbZlo?si=C6OFl9aD4I88IEH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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