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 아직 사랑을 꿈꾸고 있는가

ㅡ요하네스 페이메이르의 <연애편지>

by 조용진

“더 나이 들기 전에 가슴 설레는 사랑을 하고 싶어.!”

“누구든지 나타나기만 해 봐. 재도 남지 않게 불태울 수 있을 것 같아.”


수요일마다 만나는 음악 스터디 모임에서 유튜브 영상을 보다가 갑자기 사랑이야기가 튀어나왔다. 백발의 노부부가 손잡고 춤을 추는 모습에 괜히 코끝이 찡해지려던 찰나, 언니들 입에서 나온 말들이 가관이다.

결혼한 지 40년 가까이 된 언니들. 손주들 자랑을 릴레이처럼 주고받는 언니들. 그리고 아직도 첫사랑 ‘정원’ 씨를 잊지 못하는 ‘청일점’ 오라버니까지. 그들은 놀랍게도, 아니 너무나 귀엽게도, 여태 사랑을 꿈꾸고 있었다.

'몰래한 사랑’이라는 화두가 펄럭거리면, 마치 ‘파블로프의 개’처럼 조건반사적으로 떠오르는 그림이 있다. 바로 페이메이르의 <연애편지>다. 요망하게도, 꼭 이럴 때 튀어나와선 사람 마음을 간지럽힌다.


Vermeer_The_Love_Letter_1660-71.jpg 요하네스 페이메이르 <연애편지>. 1669. 캔버스에 유채. 44X 38.5cm ,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 소장



그 사람 편지, 또 왔어요?

창으로 햇살이 스며드는 방. 노란 옷을 입은 여인이 무릎 위에 류트를 얹은 채 앉아 있다. 연주를 멈추고, 하녀가 건넨 편지를 조심스레 펼쳐 본다. 편지를 받은 여인의 손에 설렘인지 두려움인지 모를 긴장감이 서려 있다. 눈을 둥그렇게 뜬 그녀의 표정이 참 묘하다.

여인에게 편지를 전하는 하녀의 눈빛은 정말이지 능청스럽다.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다 겪은 얼굴로 “또 왔어요. 그 사람, 내가 뭐랬어요.”라며, 농을 던지는 표정이다. 그녀는 단순히 은밀한 편지를 배달하는 하인의 모습 아니다. 이 연애의 숨은 연출자이다. 속으로는 아마 물개박수를 치며 다 안다는 듯이 여주인을 비웃고 있을지 모른다.

그런데 이 장면, 아무리 봐도 요상하다. 창으로 환한 빛이 들어오지만 방 안의 분위기는 어딘지 모르게 불안하다. 닫히지 않은 문, 은밀히 전해지는 편지. 그리고 하녀의 ‘다 안다!’는 듯한 표정까지. 이건 누가 봐도 두 사람 외에는 절대 알아선 안 되는 편지이다. 들키면 곤란한 그런 관계.(나이가 무르익다 보니, 그런 것쯤은 공기의 흐름만 봐도 알 수 있다!) 당당한 사랑이 아니라, 숨겨야 하는 사랑. 이 그림에는 불륜의 기운이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류트를 든 여인의 뒤편에는 바다와 배가 그려진 액자가 걸려 있다. 이 액자는 어쩌다가 끼어든 풍경화가 아니다.

17세기 네덜란드 회화에서 바다는 이별과 기다림, 떠나는 연인을 상징했다. 풍경 속에 펼쳐진 바다와 배, 그것을 단순한 장식으로 보고 지나치기엔 그 의미가 너무 또렷하다. 남편 혹은 애인은 지금 그녀의 곁에 없다. 물리적인 거리를 두고 있는 듯하다. 그림 그대로 항해 중이거나 바로 곁에 있으면서도 정서적으로 멀리 있는 사람. 바로 남편과의 감정적인 간극을 말해주고 있는 듯하다.


그녀의 '부부 클리닉: 사랑과 전쟁’

우리도 한때는, 솜털 보송보송한 복숭아 같은 ‘스무 살’이라는 나이를 살았던 적이 있었다. 누군가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설렘 만땅이었던 그런 시절이 분명 우리에게도 있었다. 혹시나 전화벨이 울릴까 하루 종일 수화기만 노려보던 그런 시간말이다. 하지만 세월은 야속해서, 그 설렘 가득하던 시간들은 먼바다로 떠나버렸다. 더 잔인한 것은 사랑의 감정은 늙지도 않고 그대로 남아, 여전히 가슴 한켠에서 사랑 타령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화면 구석에 놓인 빗자루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그저 평범한 청소도구처럼 보이지만, 회화 속에서 빗자루는 종종 성적 은유나 감춰야 할 흔적의 상징으로 등장하곤 했다. 누군가 다녀간 흔적, 누군가 감춰둔 감정, 혹은 들키면 안 되는 관계.... 그렇다면 이 방은 더 이상 단정한 공간이 아니다. 은밀한 감정이 스쳐 지나간, 비밀이 머무는 장소가 된다.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 얼마나 많은 오해가 숨겨졌고, 또 얼마나 많은 감정이 쓸려 나갔을까.


햇살이 환하게 들이치는 방.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듯, 이 공간은 평화롭고 정돈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시선을 살짝 돌려 커튼 뒤를 들여다보면 그곳엔 전혀 다른 풍경이 기다리고 있다. 빛이 닿지 않는 구석에는 헝클어진 악보, 그리고 막 벗어놓은 것 같은 천 조각이 널브러져 있다. 지금 이 순간, 편지 한 장으로 인해 휘청거리는 그녀의 내면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공간이다.

설레면서도 두렵고, 기쁘면서도 죄책감이 밀려드는, 현기증 나는 그녀의 널뛰는 감정들. 어쩌면 그녀는 지금, 천국과 지옥을 오가며 혼자 멜로드라마를 찍고 있을지 모른다. 드라마 제목은 ‘부부 클리닉: 사랑과 전쟁’이 좋겠다.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여자

이 은근히 발칙하면서도 비밀스러운 장면을 그린 화가는 바로 요하네스 페이메이르(Johannes Vermeer, 1632~1675)이다. 우리에겐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를 그린 화가로 친숙한 이름이다.

네덜란드 황금기 회화를 대표하는 화가지만, 생전에는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남아 있는 작품 수도 손에 꼽을 만큼 적다. 그에 관해 알려진 사실도 한 움큼이 안 된다. 화실에서 묵묵히 그림만 그리다 조용히 사라진, 수수께끼 같은 인물이다.

그가 그린 장면에는 대단한 사건은 없었다. 하지만 많은 이야기를 보여 준다. 창가로 들어오는 빛, 커튼에 숨겨진 인물의 내면, 사랑, 갈등. 긴장, 비밀스러움 등 그 모든 것을 그림 한 장에 눌러 담았다.

혹자는 그를 ‘빛의 연금술사’라고 부른다. 그 빛 속에는 미처 말하지 못한 마음, 들켜서는 안 될 감정, 그리고 두려움 가운데 살짝 고개를 든 설렘이 미묘한 표정으로 숨겨져 있다.

베르메르가 쥐어준 듯한 편지 한 장은, 노란 옷의 여인에게만 전해진 것은 아니었다. 그 설렘은 우리에게도 조심스럽게 배달되었다. 잊고 살았던 ‘여자’라는 존재가 종이 한 장, 한 통의 편지에 담겨 다시 돌아온 것이다. 엄마로, 아내로, 며느리로 살아내느라 ‘여자였던 시간’을 서랍 맨 아래 칸에 넣고 덮어둔 채 그냥 그렇게 흘려보냈다.

한때는 가슴이 뜨겁게 뛰는 사랑도 했다. 하지만 이제는 각방을 쓰며, 벽 너머 들려오는 코 고는 소리로 서로의 생존만 확인하는 사이가 되었다. 자식은 다 자라 곁을 떠나 마음의 여유는 생겼지만, 살면서 생긴 감정의 골이 너무 깊어 예전처럼 손을 내밀 수 없는 지금. 누군가의 다정한 말 한마디에 마음이 자동문처럼 ‘스윽’ 열린다.

그 흔들림이 부끄럽기보다는 살아 있는 것 마냥 느껴질 때가 있다. 그것은 바로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오랜만에 돌아온 ‘여자’로서의 감정이 아닐까.


몰래한 사랑이 더 설레는 거야

내 앞에 앉은 언니들과 오라버니. 그들의 류트는 더 이상 울리지 않지만 마음속 류트는 조율 중이시다. 사랑은 끝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나이 들수록 ‘한 장의 편지’가 더 깊이, 더 달콤하게 다가온다.

“몰래한 사랑이 더 설레는 거야?”

“워워… 그러다 부정맥 걸려요, 언니들!”

다들 한바탕 웃는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그 웃음 어딘가에 여전히 살아 있는 ‘여인’의 심장박동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오늘도 나는 조심스레 묻는다.

“그대, 아직 사랑을 꿈꾸고 있는가?”




<함께 듣는 음악>

J.S. Bach–Prelude in E minor, BWV 855a


한 손엔 류트의 현을, 또 한 손엔 막 받은 편지를 쥔 채, 하녀를 올려다보는 여인. 그녀의 눈빛에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감정이 숨어 있습니다. 설렘과 두려움, 기대와 망설임이 교차하는 그녀의 마음.

바흐의 이 프렐류드는 마치 그녀의 심장박동을 악보에 옮긴 듯합니다. 한 음 한 음. 절제된 흐름 속에 담긴 떨림은 숨이 차도록 나대는 심장과 사랑받고픈 욕망입니다.

지금은 ‘음악의 아버지’라고 추앙받는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1685~1750)는 생전에는 “예배당 오르간 반주 좀 부탁드립니다”라는 소리를 듣던 '생계형 음악가'였습니다. 생전에 대우를 못 받다가 사망 후 100년이 지나서야 세상이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지요,

그런 바흐가 남긴 이 짧은 프렐류드는 혼자 말도 못 하고 속마음 앓는 이들의 연주처럼 들립니다. 크게 주목받지 못했던 삶을 살았던 화가 페이메이르도 떠오르네요.

아주 단정한 척 시작되지만, 듣다 보면 뭔가 자꾸 꾹꾹 눌러 담은 듯한 멜로디. 그래서 더 울컥하고, 그래서 더 페이메이르의 그림과 닮은 듯합니다.

이 곡은 한동안 잊고 살았던 ‘여자’라는 감정이 조용히 깨어나는 순간의 배경음악이 되어줍니다. 비록 남편은 옆에서 코를 고는 중이고, 류트는 조율 중이지만요. 편지 한 장이 손에 들려지는 날에는 우린 다시 사랑할 수 있으려나요.(부정맥은 약으로 어떻게 해보렵니다. )


https://youtu.be/SVElSEYcg78?si=ylBJnoGDniGTjs5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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