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생명이 태어나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까지 자신만의 걸음과 속도로 삶을 살아갑니다. 성격이 급한 이는 보폭을 크고, 빠르게 걷기도 하고, 조금 느긋한 이는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며 앞으로 갔다 뒤로 갔다 하며 걷기도 합니다. 길은 어떠한가요? 환경에 따라 꼬불한 길, 똑바른 길 그리고 높낮이가 심하거나 평탄하거나 등 실로 다양한 길이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과 여러 가지의 길이 만나면,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과 속도가 가진 경우의 수는 셀 수가 없이 많습니다. 이는 다른 말로 나와 일치하는 세상 사는 방법을 가진 사람이 없다는 것과 동일합니다. 결국, 타인의 세상 사는 방식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고, 그들이 사는 방식이 잘 못 되었다 할 수도 어렵습니다. 이 두 가지에 대해 하나씩 짚어 볼까 합니다.
1. 아이의 방법을 이해하지 못하다.
저는 아이의 습득 방식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아이의 환경을 살펴보면, 글을 읽을 수 없으니 스스로 책 읽기란 불가능합니다. 한글을 읽을 수 없는 아이가 책을 읽는 방법은 그림을 보는 것입니다. 알록달록 생생하게 그려진 그림을 보며, 내용을 유추해야 합니다. 그러나 처음 보는 그림은 어떠한 내용도 떠올리지 못합니다. 아이의 상상력이 풍부하다고는 하나, 머릿속의 혼란과 부담감이 가중될 겁니다. 결국, 아이가 택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입니다. 열심히 귀로 들어 자신의 것으로 익히는 겁니다. 내용을 어느 정도 익혀 놓으면, 그림을 따라 내용도 함께 머릿속에서 떠오릅니다. 그러나 한 번 듣는다고 그 내용을 기억할까요? 게다가 한 장 한 장 그림이 따로 있다 보니 대략적인 흐름만 알고, 책을 보기에는 아이에게 답답함으로 느껴졌나 봅니다. 우리가 읽듯 한 장의 그림과 글을 정확히 일치화하여 읽어내고 싶었던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아이는 수없이 반복하며 읽어 달라고 요청했고, 자신만의 속도로 책을 자기 것으로 만들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그림과 글이었던 책은 아이에게 그림과 말의 소리로 만들어졌습니다.
2. 아이가 틀렸다고 말할 수 없다.
세월이 흘러가면, 아이는 다양한 경험을 할 겁니다. 모든 것이 처음 겪는 것이기에 지금의 책 읽기처럼 자신의 방법을 찾을 겁니다. 지금까지 해왔던 경험으로 도전해 보고, 결과를 지켜볼 겁니다. 이전 경험의 노하우로 다행히 쉽게 헤쳐간다면, 큰 무리는 없습니다. 장애물이라 여겨질 것 없이 각 단계를 넘어갈 겁니다. 그러나 한 번씩 크나큰 장애물이 등장합니다. 자신이 알고 있는 방법이 통용이 되지 않을 때입니다. 몇 번은 같은 방법으로 똑같이 시도를 합니다. 노력의 정도를 달리하며 그 벽이 부서지는지 볼 겁니다. 하지만, 그때의 벽은 노력의 정도에 따라 부서지는 벽이 아닙니다. 전혀 다른 도구와 수단을 사용해야 합니다. 아이는 그 벽 앞에서 한 참을 서성이며 헤맬 겁니다. 지금까지 자신의 경험과 지식이 통용되지 않는 극한의 벽 앞에서 좌절감과 무기력감을 느낄 겁니다. 옆에서 지켜보는 우리는 아이를 존중하고, 기다려 주어야 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방법으로 쉽게 하지 않는 것에 틀렸다 말하지 않고 인내의 시간을 함께 견뎌주는 겁니다. 우리 부모가 알고 있는 방법은 우리의 방식일 뿐입니다. 정답이 아닙니다. 그 외에 수많은 돌파 방식이 있고, 길이 있습니다. 새로운 생각으로 아이는 분명 그 벽을 넘어설 겁니다. 여러분도 그리고 저도 몰랐던 답을 아이는 찾아낼 겁니다.
아이를 키우다 보면, 가장 힘든 것이 인내와 믿음을 가지는 겁니다. 내 아이이기에 '잘할 것이다'라는 믿음보다는 '잘할 수 있을까'라는 걱정과 불안이 큽니다. '혹시나 시기를 놓치면 어떡할까'와 '제대로 된 답으로 아이를 인도하지 못하면 어떡할까'의 두려움이 우리를 사로잡습니다. 이 부분을 인정합니다. 우리는 아이의 부모이고, 책임자입니다. 험난한 세상을 슬기롭게 살아갈 지혜와 지식 그리고 환경을 주어야 합니다. 그뿐만일까요? 경험해 보지 못한 수많은 상황이 걱정되고, 많은 시행착오를 겪을까 두렵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아이는 우리 없이 살아가야 합니다. 언제까지나 곁에서 그 방법을 알려줄 수 없습니다. 게다가 앞서 말했듯 우리의 방식도 정답이 아닙니다. 알려주지 못해 우리만큼 살지 못할까 걱정이 되지만, 반대로 말하면 우리라는 한계를 아이에게 덮어 씌우는 셈입니다. 더 큰 성장을 할 수 있지만, 딱 우리 부모만큼만 살게 됩니다. 질문을 우리에게 던져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아이가 어떤 삶을 살기를 원하는지를요.
저는 제가 노력해 성장하고, 변화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아이에게 강요하기에는 제가 가진 세상의 틀이 너무 한정적이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아이의 환경이자 미래가 저라는 생각을 하니 참으로 답답해졌습니다. 저만큼만 살기를 바라지 않고, 저보다 나은 인생을 살았으면 합니다. 그래서 아이가 가진 주위 환경을 우선 넓혀 주려 합니다. 세상 일 뜻대로 되지 않기에 아이가 나를 넘어설 수 없다 하더라도, 나만큼은 살게 해주고 싶기 때문입니다. 부모의 인생이 커지면, 부모만큼만 살아도 큰 손해는 보지 않을 것 같습니다.
세상 사람 살아가는 방식은 모두 다르고, 정답이 없습니다. 다만 멈추어 있는 자와 나아가는 자는 구분할 수 있습니다. 아이가 나아가는 방식과 속도를 존중할 수 있도록 우리 부모들이 먼저 그 세상을 넓혀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넓어진 부모의 환경만큼 아이에게는 기다림과 인내의 시간을 더 가져볼 수 있지 않을까요? 결국, 오늘도 돌아오는 이야기입니다. 아이를 위해 우리가 먼저 성장해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