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하고도 부산스럽게 가만히 열심히
“Never give in, never give in, never, never, never, never—in nothing, great or small, large or petty—never give in except to convictions of honour and good sense.”
결코 굴복하지 말라, 결코 굴복하지 말라. 결코, 결코, 결코, 결코 — 크든 작든, 중요하든 사소하든 — 결코 굴복하지 말라. 단, 명예와 양식의 신념 앞에서는 예외다. _윈스터 처칠.
2차 대전 당시 독일의 대규모 공습을 받고 두려워하는 영국 국민은 윈스터 처칠의 연설을 듣고 명예와 신념을 다해서라도 굴복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공포와 허탈감이 교차하는 전쟁 중에는 잃어가는 영혼을 붙잡아주는 리더들의 명언과 행동이 빛을 발한다. 포기는 죽음이니, 굴복하지 않는 생활이 삶이 되는 시절이 그때도 있었고, 앞으로도 생길 수 있다.
세계 각국을 돌아다니며 책갈피를 수집하는 친구가 있었다. 나는 딱히 그렇지도 않으면서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 좋았다. 여행과 독서모임이 취미인 그녀는 유럽에서 산 것이라며 책갈피를 모아둔 통에서 하나 골라 나에게 철 책갈피를 선물해 줬다. 회색의 얇은 직사각형에 남색 문구로 새겨진 글자들이 특별했고, 빳빳한 타이를 맨 듯 막대 끝에 간단한 리본이 메여 있어 격식을 차린 느낌이 멋졌다. 차가운 금속을 따뜻한 종이 속에 끼워 넣는 순간들이 좋아지면서 나도 친구의 취미를 물려받게 되었다. 지금은 십 년이 넘도록 같은 멤버들과 독서모임을 이어오고 있다.
책갈피에 새겨진 문구 "Never, never, never quit."이 여러 책 속의 철학과 내 개인의 삶 속 경험이 어우러져 의미가 깊어졌다. 어떤 시련에도 결코, 결코 물러서지 말자는 말이 내 마음속에도 감색 빛으로 아로새겨졌다. 전쟁만 한 시련은 겪은 적이 없으나 피를 연상시키는 경험을 이 글에 갖다 붙여도 괜찮을까 떠올려본다. 생에 가끔 좋아서 시작한 것들이 내 영혼을 마구 흔들어댈 때면 정신줄 바짝 잡도록 붙들어주는 쇠 맛 나는 좌우명이 되기도 하였다.
그러니까 출산 같은 것 말이다. 한 남자만 보고 내 인생 바쳐서 사랑만 하다 죽어야지 싶었는데, 첫 아이를 낳다가 이대로 가다가는 죽을 수도 있겠다는 순간을 경험했다. 그때도 무식한 것이 죄가 되었다. 사랑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라는 말보다 무식자는 당연히 뒤탈이 따른다는 대역죄인의 고통을 맛봤다. 자연분만이 아기에게 좋다는 소문을 따랐고, 당시만 해도 무통 주사의 안전성을 운운하는 글을 옹호했었다. 여자의 몸을 잘 아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되어본 적이 없는 남자 산부인과 담당 의사는 그런 나의 의지를 응원했다. 그러나 출산 당일, 처음 나타난 수간호사 여선생님은 내 골반 크기를 보고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미간을 좁혔다. 여차하면 수술이라는 옵션도 있었다. 그런데, 실제로 옆에 있던 산모는 진통에 정신을 잃은 것인지 태아까지 호흡이 불안정해져서 급히 수술실로 옮겨지는 소리가 들렸다. 겁도 나지만 비장해지는 마음이 생기며 정신을 차려야지, 싶었다.
출산을 전쟁이라고 친다면, 태아를 몸 바깥으로 밀어내는 것이 승리가 된다. 나는 피를 흘리면서도 전장의 장군이 뒤를 돌아보지 않듯이 계속해서 힘을 내었다. 혹시나 진전이 없는 나를 포기할까 봐 아까 전 수술실로 실려 간 산모에게 태아가 위험해진다며 엄하게 말했던 간호사에게 말했다. "선생님, 저 할 수 있어요. 힘들 때 도와주세요." 다른 산모의 의식을 찾기 위해 뺨을 때리던 간호사의 손이 내 손을 잡았다. "산모님 잘하고 계세요. 조금만 더 기다렸다가 의사 선생님 부를게요." 그 말에 용기도 났고 두려움도 커졌다. 나도 태아도 상태가 괜찮은데, 유도제를 맞으면서도 방 뺄 생각이 없는 상황이 해결해야 할 문제였다. 진통이 피크가 되었을 때 분만실로 옮겨졌고, 물러설 수도 포기할 수도 없는 생의 진통이 클라이맥스로 치달았다. 최대치의 진통이 아주 짧은 간격으로 몸을 관통하고, 관통하고, 또 관통했다. 살아야겠고, 살려야 한다는 생각으로 매초 최선을 다했던 순간들의 기억이 생생히 떠오른다.
낳고 보니 내 몸으로는 쉽게 낳을 수 없는 크기의 태아였고, 의사 선생님도 조금 놀란 듯했다. 진통 시간은 8시간으로 짧지도 길지도 않았지만 출산 후 기와 피를 다 쏟아낸 몸은 조금 일으킬라치면 귀에서 삐- 소리가 나서 4시간이나 움직일 수 없었다. 지피지기(知彼知己)의 실패이자, 포기란 없다(Never, never, never quit)의 성공 경험이었다.
부상의 늪에 빠진 나는 무엇을 더 알아야 할까. 주저앉은 김에 생각해 보려 했다. 또다시 무식이 죄명인 죄인은 되기 싫었다. 나아졌지만 아직도 낮은 체력(눈빛만이 강렬한 점), 발 안쪽 복숭아뼈 아래 뼈 하나 더 있는 것(부주상골 증후군), 그리고 짧은 구력으로 스킬이 필요한 공을 무리하게 받아보려 한 것(자칭, 뱁새 증후군). 앞으로 조심하고 키워나가야 할 숙제였다. 그리고, 당연히 나는 그만두지 않는다. 아프면 약을 먹고서라도 약속 장소에 나서는 나였다. 스터디 중에 오한과 어지러움이 동반된 장염 증세를 견디지 못해 수액을 맞으러 갔다가 다시 공부하러 가자는 나를 말리던 친구들이 생각난다.
3주에서 한 달 정도 휴식을 취해야 한다는 말을 들었지만, 어디 피가 흐르는 것도 아니었고 수액을 꽂고 있어야 하는 상황도 아니었으니 이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 했다. 사실, 다친 직후부터 사흘간은 상당히 불편했다. 발바닥이 지면에 닿자마자 아팠지만, 아프다 하면 남편이 이제 운동 그만두라고 할까 봐 걱정이 되었다. 둘째 아이는 아직 손이 많이 가는 나이라서 내가 가만 있기 어려웠다. 기어보고, 깨갱발로 조심히 뛰어보다가, 아직 물려주지 않고 있던 아기용 붕붕이를 탔다. 다치지 않은 왼발로 힘차게 거실을 휘저으며 아이가 똥 마려워! 하면 화장실에 데리고 가고, 목말라! 하면 주방으로 날아다녔다.
대회 전날 다친 것이라, 몸도 정신도 예열된 상태였다. 육아를 제외한 시간, 원래라면 운동하고 있을 시간에 나는 유튜브로 볼 수 있는 초보자를 위한 배드민턴 관련 영상을 모조리 찾아봤다. 그렇게 해야 아직도 고조되어 있던 몸의 긴장감과 갈 길을 잃은 정신이 균형을 찾을 수 있었다.
절뚝거릴 수 있게 되었을 때는 두 손 두 팔이 아주 건강한 것을 대조적으로 실감하였다. 두 발 두 다리로 뛰어다니는 사람들이 부럽기도 했다. 가만히 서서 할 수 있는 연습은 셔틀콕 벽치기였다. 아이들이 놀고 있는 거실을 비집고 들어가 "엄마 유리창 좀 때릴게. 비켜줘 봐" 허락을 구하고 치고 치고 또 쳤다. 처음에는 나도 나도 하던 녀석들이 나중에는 엄마가 그러거나 말거나 유리창 쪽에 붙어 앉아서 놀다가 무심히 공을 주워주기도 했다. 대답 없는 유리창이 투명하기도 답답하기도 했다. 함께 게임하던 사람들이 그리워서 혼자 이러고 논다며 웃픈 근황을 알렸다. 곧 클럽에는 아린 씨 혼자서 집에서 맹훈련한다고 헛소문이 났다.
3주가 지나자 슬슬 걸음이 자연스러워져서 뛰어보고도 싶어졌다. 물론 불편감은 계속 남아있었다. 주로 다치지 않은 쪽 다리에 의지를 해서 걷는 것이었고, 배드민턴 자세를 잡는다 해도 매 순간 조심스러웠다. 한 달이 다 되어갈 무렵, 밴드에서 새 소식이 올라왔다. 동호회 월례회에서 유례없이 왕초보 대상 대회를 연다고 했다. 다시 심장이 뛰었다. 한 달을 푹 쉬었고 발도 아직 아프지만 곧 레슨 복귀를 앞두고 있기도 했고, 분위기가 그리워 체육관 냄새나 맡고 오자는 생각으로 참가 신청 버튼을 눌렀다.
그런 나를 남편의 엄마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셨다.
-아린아, 배드민턴 계속하는 거였어? 아직도 다리가 아픈 것 같은데.
-곧 다 낫겠죠. 어머니 이거 너무 재미있어요.
-그래. 운동이란 원래 그런 거야. 다치면서도 또 하게 되어 있어.
싱긋- 웃어주는 왕년의, 아니 현역 운동부자 내 시어머니의 명언이 내 발길을 한 번 더 성큼 이끌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