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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eul illang Jan 21. 2024

사랑을 무던히 노력하는, 당신에게

(10) 사랑을 이해하고자 하는 누군가의 노력을 애정하여 - 일랑


오랜만이에요, 당신. 잘 지냈어요?

오늘 밤 갑자기 당신에게 편지를 써야겠다 생각했어요. 좀 더 정확히는, 생각을 했다기보다 갑자기 운명처럼 확 스쳐지나갔달까. 당신에게 정말 못했던 말과 마음- 오늘 지금의 나라면 다 훌훌 털 수 있겠다 하고. 왜인지 알아요? 당신을 이제는 먼지 한 톨 만큼이라도 사랑하지 않는구나- 나 확신하게 됐거든. 그래서, 그래서요. 그래서 당신에게 편지를 써요. 마음에 걸리는 것 하나 없이 상쾌한 바람 지나가듯 한 방향으로 훅 흘러갔달까. 그런 당신에게 난 어떤 할 말이 남아 문득 글을 쓰고 있는 걸까, 나도 내가 궁금하네요. 이 편지의 끝이 어디일지.


나더러 참 좋은 사람이고, 좋은 여자라 했죠.

남자들은 웃겨. 자기가 가지지 않을 거면서 상처 주기 싫으면 꼭 저런 문장을 뱉더라. 그 때 나 최악의 상태였던 건 알고 있죠? 내 인생에서 그보다 더 나쁘고 엉망진창일 수 없었는데, 그 때에도 나 꽤나 멋진 여자였나 보죠? 당신의 눈으로 본 나는 그래도 좋은 사람까지는 됐네요. 사랑이 못되어 그렇지.

 

그런데, 당신이 어렵게 뗀 입술 사이로 새어나온 저 문장은 왜 그렇게 유달리 내 마음 안에 깊숙히 자리잡았을까. 저 문장이 꽤 무거웠네요, 내겐. 당신을 위해 가공된 여자가 될 수록, 당신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어. 그리고는 진심으로 미안하다는 눈짓을 보냈어. 그 모든 시간들이 비참해서 난 자책에 빠지기도 했어요. 서로가 곁에 있음으로 죄책감을 느끼는 관계라니, 그거 너무하잖아요. 그래서 내가 결심을 내렸고요. 당신 곁에 달랑달랑 붙어있겠다고 노력하던 손을 다시 가져가 버렸잖아요. 그 회수된 손길을 당신은 얼마나 고대해왔을까, 얄미워지려다가도 난 자신만의 동굴에서 고통에 허덕이는 사람에게 내가 어떤 형벌을 더해버린건가 싶기도 했네요.


‘좋은 여자는 나 왜 못 되는 걸까, 난 매번 왜 좋은 사람이기만 하는 걸까. 그건 내 매력이 떨어지기 때문인가 보다.’

그렇게 시작된 자기 단장은 부족함만 돋보이게 하는 거, 지금의 나는 알아요. 부들부들 떨면서 나 꽤나 괜찮은 여자라고 일부러 치마를 들추지 않아도 난 있는 그대로 예쁜 사람이라는 걸, 진심으로 받아들였거든요. 당신도 역할에서 벗어나 봐요. 난 내가 내린 나만의 형벌에서 벗어나 상쾌해졌으니.

나는 누군가의 여자친구의 역할을 수행하고 싶은 스물 아홉이 된 직장인이 아니고, 연애 말고 사랑을 하고 싶다며 소개팅하는 남자 앞에서 말도 안 되는 궤변을 늘어놓던 사랑 숭배자도 아니고, 그냥 나예요. 내 이름 세 글자. 나. 내가 나에게 역할같은 거, 역할의 의무 같은 거, 굳이 지우지 않아도 되더라고요. 이 얘기를 왜 하냐면, 잔소리 겸 당신과 나누었던 주제의 답을 나 알려주고 싶어서요. 그래요- 기억나요? 사랑이요. 그렇게 찾아 헤메던, 사랑이요. 나- 사랑을 이해한다며 고개를 끄덕이게 됐어요. 부럽죠?


아, 나 이제 왜 내가 이 편지 쓰고 싶었는지 알겠어요. 당신을 연민해요. 다만 당신에게 내 이야기 닿을 수 없기에- 이렇게 비겁하게 글로 남기는 거예요. 언젠가 당신이 혹여나 내 이야기가 아닐까, 의심하며 읽어주기를 바라면서. 연민이라는 단어 썼다고 혹시 화내지 말아요. 불쌍한 것과 결이 다르니. 내가 가진 연민은, 애정에 기반한 거거든요. 당신을 사랑해요. 음- 남녀사이 말고, 인간으로요. 복잡한 세상을 더욱 복잡하게 살아가는 비슷한 부류로서 느끼는 사랑이랄까. 당신이 그토록 외치던 인류애,  그토록 치워버리고 싶던 세 글자 이젠 내가 찾게 됐네요. 나, 세상과 사람을 사랑하거든요. 그래서 온화한 마음으로 당신을 사랑한다 말할 수 있어요. 한 인간으로서, 다른 인간에게 건네는 환대의 꽃다발이라고 생각해 줘요.


내가 소화한 사랑은, 상쾌한 거더라고요. 나 요새 상쾌라는 말을 꽤 자주 써요. 그것 말고는 달리 설명할 기분이 없는걸. 깊지만 산뜻한 것, 그게 사랑이더라고요. 말로 정확히 설명할 수 없다면, 당신은 사랑을 이해한 게 맞아요. 나도 그러니까.


나- 어떤 남자때문에 마음을 다쳤어요. 당신한테 그러고보니 말도 했었어. 영화 보러 가기 전에, 서점 가던 길 있잖아요. 거기서 말했던 것 같아. 신경 쓰이는 남자가 있다고요. 당신은 그저 묵묵히 들어주었지. 난 그 때에도 내 마음의 흐름이 이렇게 될 거라 알고 있었던 걸까요? 지금 생각하니 좀 웃긴 상황이네.


나, 그 사람때문에 상처받았어요. 최근에. 마음이 찡한게, 아프더라고요. 그런 아픔을 나는 있는 그대로 마주했어요. 아프고 찌릿한 채로 좀 덜 말하고, 없는 힘을 일부러 내려 하지 않고, 차분해진 채로 하루를 살아냈어요. 그랬더니, 갑자기 알게 됐어요. 당신이랑 나랑 돈오점수 말하면서 눈 마주치고 깔깔 웃었던 거 기억나요? 그 네글자 같이, 나 갑자기 깨달았지 뭐야.


내 모습 있는 그대로 상대방에게 확실하지 않은 호감을 표현하고, 그러다 거절도 당하고, 그래서 아픈 마음을 맞닥뜨리고. 하지만 후회 없는 것. 그래서 한 켠으로 후련한 것. 내가 잘못되었다고 머리를 쥐어 뜯지 않는 것, 괜히 표현했다며 한 번도 자책하지 않은 것. 그 때의 나는 사랑 앞에 최선을 다했다 당연히 생각이 드는 것. 그래서 내 마음을 받아주지 않은 사람을 이해하려 들지 않고, 그냥 내게 나쁜 사람이다 있는 대로 실망하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걸 끌어안은 내 모습이 거울 앞에서 참 예뻐 보이는 것.


 

이게 내가 이해한 사랑이라는 감정의 흐름이에요. 어디서 느낌표가 왔는지, 당신이 좀 맞혀 볼래요? 힌트를 주자면, 당신과 내가 동시에 정말 못했던 부분. 찾아봐요.



정답은, 두구두구, 이 문장입니다. ‘그냥 내게 나쁜 사람이다 있는 대로 실망하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걸 끌어안은 내 모습이 거울 앞에서 참 예뻐 보이는 것.’ 맞혔어요? 틀렸어요? 뭐 다른 곳에 밑줄을 그어도 괜찮아요. 내 사랑은 이렇다고 내가 내 단어로 이해한거지, 당신의 사랑은 또 다를 테니. 우리 정신 승리 못하고, 내 앞에 있는 사람이 참 좋고 멋진 사람인데 왜 사랑에 빠지지 못할까 머리를 쥐어 뜯으며 자책했잖아요. 그래서 결국 사랑을 하지 못하는 원인을 스스로에게서 찾고. 그런 자신이 별로라서, 너무 보잘것없어서 사랑을 할 자격을 박탈시키고. 그러면서도 갑자기 하늘에서 툭 떨어질 대단하고 고매한 사랑이라는 걸 꿈꾸는. 그게 우리가 그간 생각했던 사랑이라는 거였잖아요.




나는 말이죠. 주관적으로, 나만을 위해 존재하는 게 사랑이라고 결론내렸어요.
다른 사람 이해하는 태도 없이, 그냥.
그냥 주저하지 않고 확실하지 않은 감정일지라도, 가벼워 내보이기 부끄러운 작은 마음일지라도 일단 표현하는 것.
 그래서 그 작은 마음을 눈사람 만들듯 조금씩 함께 붙여나가달라 내 앞 사람에게 부탁해보는 것.
사랑은 처음부터 거대하고 멋진 눈사람이 아니라, 누군가와 함께 만들어나가는 과정에서 점차 커지고 대단해지는 눈뭉치를 아름답다 느끼는 것이었어요.

그 모든 시간이, 작던 크던 사랑이더라고요.


 그랬더니, 나는 작은 마음이나마 사랑의 시작이 될 수 있는 조각들을 누군가에게 건넬 수 있게 됐어요.  그리고 만약 상대방이 다른 눈사람에게 흥미가 있어, 내 눈뭉치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면 가차 없이 그 눈덩이를 상대방에게 휙 던져버리는 고약한 취미를 갖게 됐고요. 마음 파괴! 하는 것 마냥 말예요.

그렇게 작은 마음이 깨부셔지고 나면 나는 좀 슬퍼져요. 아프고요. 하지만, 상쾌해요. 산뜻하고요. 손을 탈탈 털면서 나를 보죠. 이런 작은 덩어리를 소중히 여겼던 내가 참 예쁘고 애틋해요. 그래서 나는 심지어 뿌듯하기까지도 해요, 약간이지만. 나를 위해 내가 부끄럽고 창피한 순간을 견뎌낸 거잖아요. 나 참 잘했어, 하고 칭찬도 해 줘요.


함께 공을 굴려갈 누군가를 찾는 일을 주위에서는 청춘이라고 부르더군요. 그 청춘의 시간이 꽤나 고달프고 창피함으로 가득할지언정, 이젠 지치지는 않아요. 포기하고 싶지도 않고요. 

나는 여전히 예쁘고 사랑받아 마땅한 존재거든요. 사랑할 줄 아는 성숙한 여성이기도 하고요. 매력적인 여자, 그거 나예요.

내가 나라서 가득한 매력, 알아볼 줄 아는 대단한 눈썰미를 가진 남성을 만난다면 그 사람도 복 받은 거예요. 이렇게 사랑을 깊이 통찰해본 여자가 소중히 대해줄 사랑이라니, 얼마나 좋겠어요? 호호.


얼마 전까지만 해도 걱정했어요. 당신을 다시 만나면 혹여나 내가 속절없이 다시 끌릴까봐요. 이제 전혀 아닐거라고 나 확신이 들어요. 그리고 사랑도 알게 된 겸, 당신이 생각났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에 구름 한 점 없이 깨끗한 겸 남은 애정을 털어 봤어요. 당신은 헤어진 여자친구거나, 모종의 관련이 있던 여자라도 괜찮은 인간이라면 곁에 친구라도 남고 싶다고 했잖아요. 성숙한 사랑을 할 줄 아는 매력적인 여자는, 그러니까 나는, 미안하지만 다음에 올 사랑을 위해 그건 못하겠으니 이렇게 글로 안부를 묻네요. 나는 당신의 약속과 시간에는 함께하지 못할 거예요, 앞으로도 계속.


하지만 마음 가득히 사랑을 보냅니다.

건강하고요, 늘 행복할 수 없어도 가끔은- 행복한 시간 곁에 숨 쉬는 나날들 되기를 바라요.


 그럼, 정말 잘 지내요.


사랑 탐구 졸업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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