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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eul illang Feb 27. 2024

좋은 사람에게 생기는 안 좋은 일 앞에서

(22) 스스로를 버리지 않기로 하는 다짐을 사랑하여 - 일랑


그 어떤 말도 듣고 싶지 않다.
위로도, 힐난도, 조언도.




그 어떤 마음도 받고 싶지 않다.
동정도, 분노도, 관심도.



니체가 밉다. 고통을 껴안으라는 말같지도 않은 소리, 왜 하고 다녀서 감당 못하는 사람은 루저처럼 만들어놓냐고. 꼭 고통은 나만의 것이어야 하는지. 남들에게 공평하게 주어질 수는 없는 건지. 내가 좀 잘 참는다고서니, 이만한 삶의 풍파를 또 새롭게 견디라고 다양한 퀘스트를 던져놓는 신도 밉다. 신이, 하늘이 있다면 내게 이렇게 무심할 수가 없다. 그러니 하늘도 그 무엇도 없는 것이다- 자조하며 친구 와인바 소파에 드러누웠더랬지. 뾰족한 내 분위기에 친구는 어쩐지 너와 말을 덜 해 찜찜했다며, 늦은 밤 나를 전화로나마 불러냈다.


아, 나 여기 저기 찌를 연필심같구나. 잘 깎여져버린.

찔린 게 나인 줄 알았는데, 내 뾰족함에 남들이 찔리면 영문도 모르고 아프겠구나.


오랜만에 상담 선생님을 뵈었다.

갑작스레, 하지만 정중히 또박또박 쓴 문자 안에 섞인 내 울음을 그녀는 쉽사리 알아챘나보다. 원래 있던 다른 약속을 미루고 또 다시 끼어든 내 삶, 기꺼이 손 잡아 주었다. 오랜만에 본 선생님은 내게 무슨 일 있냐 물었고- 나는 답했다.



[선생님, 제가 딱 한 번만. 아무한테도 안 한 얘기고, 앞으로도 없을 얘기거든요.

저는, 제 인생이 너무 버거워요. 버거워서 참을 수가 없어요.

이만큼 강해졌나 했는데- 강해졌기에 망정이지 저 정말로, 정말로….]



나를 다시 둥글둥글하게 다듬어 주세요.
깎지 말고, 여기저기 상처내지 말고, 그저 쓰다듬어만 주세요.



상담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길,


[또 다시 우는 방법을 잊었네요. 여기서는, 안 그래도 괜찮아요.
억지로 웃지 않아도 괜찮아. 웃으려고 힘주어 올리는 모습이, 그게 너무 슬픈 걸요.
그래서 걱정돼요. 이건, 슬픈 일이니까요.]



울어도 되냐, 나는 물었고 그녀는 이리 오라며 두 손을 뻗었다.


다시 물었다.


[울어도, 제가 여기서 울면, 이 문을 못 나갈까봐 무서워서요. 저 울어도- 집에 갈 힘이 남아 있을까요?]



그만큼 쌓인 슬픔이라는 걸, 참 돌려도 말하는구나.

지금 생각하니 서툴고 귀엽기 짝이 없네- 나 자신.



껴안기도 벅찬 아픔, 나는 또 나여서 겪어내야만 하는 건가. 내가 뭐라고. 나만. 왜 맨날 나만. 다른 사람들은 잘만 살아가던데. 내가 세상에 뭘 잘못했길래. 얼마나 무슨 행동을, 더 했어야 하는 거야. 만약 그때, 그러지 않았더라면. 그 사람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 자리에 나가지 않았더라면, 나를 더 지킬 줄 알았더라면, …내가 나이지 않았더라면, 그랬다면,



입술을 깨물고 선생님 옷에 눈물이 묻을까 걱정하는 귓가에 들리는 목소리.


그건, 딱 하나의 정답.


내가 그렇게나 듣고 싶었던, 딱 하나의 꼭 맞는 마음.



[그건 그냥 벌어진 일이에요.  그냥, 벌어진 일.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나 때문이 아니라, 그냥 벌어진 일.

나만 책임지고 아파야 하는 게 답답하고 억울해, 참을 수가 없어. 그래서 나를 파괴하기로 했는데,



[그리고, 살아줘서 고마워요. 여기까지 와 줘서 너무 고마워. 얘기해줘서 고마워요.]



그래요 선생님? 이런 저라도, 살아도 괜찮아요?저는 제가 삶에, 이미 어떤 선을 넘어버린 것만 같아요. 삶은 늘 예상치도 못한 일이 일어나고, 나는 그냥 겪어내야만 했는데, 근데 다 겪어내고 나면 늘 나만 더럽혀진 기분이야.


이렇게 탁해져버린 사람도, 매일 나를 실망시키고 사는 사람도,  

나인 채로 살아도 괜찮은 거예요? 나는 나를 용서할 수가 없어.

겨우 이런 내가 되려고 그동안 열심히 살았던 게 화가 나요.

내 모든 바른 시간이 다 물거품이 된 기분.



죽고 싶다는 말 단 한 마디도 한 적 없는 나를 선생님이 금세 알아챘다. 채를 꺼내 얼른 나를 건져냈다. 어두움에 빠져 퍼덕거리는 나를 또 다시 안아주었다. 나는 검은물이 들까봐 걱정하는데, 신경도 않고 추웠겠다고 머리칼을 말려 주었다. 그 안에 기대어 숨을 쉬었다.



삶은 또 다시 살아지는 것이고- 나는 또 다시 오늘을 살아내고 싶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본 꽃이 참 예뻐서.
언젠가 오늘의 나조차 껴안으려고.
내가 맞이할 나를 사랑하려고.



문을 닫고 나왔다. 다음주에 또 보기로 했다. 선생님이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는데, 마음 속에 문장이 들어와 앉았다.



[좋은 사람에게 생긴 불행한 일에 흔들릴지언정, 그저 나로서 나를 껴안아주자. 나라도 껴안아주자.]



아, 알았다.


선생님이 내민 손에 쓰여져 있었나보다. 품 안에서 심장과 심장으로 대화를 했나보다. 마주치는 두 눈은 분명 같은 말을 하고 있었을 것이라 자부한다.


나를 내치지 않고, 나라도 나를 어여뻐해 주기로 했다.

세상 속에 놓여진 내가 애틋하고 안쓰러워서.


바르게 살아간 어제까지의 내게 고마워서.

내가 아까워서. 나는 여전히 좋은 사람이라서.



오늘의 나를 내치지 않기로 했다.
불행한 일을 겪을 때 가장 쉬운 일은, 나를 버리는 일이었다.
그게 가장 탓하기도 쉽고, 원인을 찾기 빨랐으니까.




이제, 나를 버리지 않기로 했다. 꼭 챙겨서 나를 삶 속에 다시 놓기로 했다.

불행한 일은 불행한 일로, 슬픔으로 감싸보기로 했다.
승화시키던 불태워버리던 그 무엇이든지- 일단 나로 살아보면서 결정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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