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경새재를 넘다 (하)

혼자여도 괜찮다

by 시현

"5, 4, 3, 2, 1, 출발!"

다 함께 외치며 드디어 대회가 시작되었다.


초반은 약한 경사도에 잘 닦인 길이었다.

출발 신호와 동시에 모두 함께 뛰기 시작했고,

나도 주변 사람들과 함께 적당한 페이스를 맞춰 달려 나갔다.


10분 정도 지났을까.

숨이 차서 더 이상은 뛸 수가 없었다.


아, 맞다. 나 이렇게 꾸준하게 오래 못 뛰지.

평지에 가까운 길인데도 뛰는 건 여전히 어려웠다.


3분도 못 뛰던 내가 이 정도면 많이 늘었나, 싶다가도

모두 다 앞으로 내달리고 있는데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망설여졌다.


결국 나는 뛰기를 중단했다.

추위 때문에 입고 있던 바람막이를 벗어서 조끼에 욱여넣었다.


잠시 숨을 고르고 다시 대열에 합류했다.

그리고 살짝 옆으로 빠져서 빠른 걸음으로 걷기 시작했다.


어릴 때부터 뛰는 건 잘 못해도

빠른 걸음 걷기는 누구보다 빨랐던 나다.

그래, 이것도 어쨌든 내가 앞으로 나아가는 방법이다.

무조건 꼭 뛰라는 법은 없으니까.


첫 번째 목표인

“컷오프 시간 안에 CP 통과하기”를 위해

열심히 빠른 걸음을 재촉했다.




뛰지 않고 걷기 시작하니 주변 풍경이 보였다.

선선한 가을 한가운데

문경새재 1 관문 길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빠른 걸음을 걸으며

바위 사이로 흐르는 계곡, 그리고 단풍을 감상했다.


많은 사람들이 산에 오는 이유는 아마도 이런 것일 거다.

단지 예쁘다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 있었다.



1 관문과 2 관문을 지나고,

어느덧 저 멀리 체크 포인트가 보였다.

시간을 확인해 보니 출발한 지 이제 한 시간째.


두 시간 안에 들어와야겠다는 목표를 절반이나 줄였다.


아, 이제 한시름 놨다.



3 관문까지 올라갔다 다시 2 관문까지 내려왔다.

사실 이번 대회 코스의 가장 힘든 부분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2 관문에서 길을 틀어 주흘산으로 올라가기 시작한다.


해발고도 1108m인 주흘산의 영봉과 주봉을 이어서 가는 코스.

해발고도 1,000m를 넘는 산도,

총 상승고도 1,000m 이상인 산행도 해본 적 없는 나로서는

이 코스가 어떤지 감조차 오지 않았다.


마냥 힘들겠지,라고 생각해 왔다.

하지만 막상 닥치니 정말 더더욱 힘들었다.


초반 업힐부터 체력 안배를 위해 폴을 꺼내 들었다.

확실히 훈련한 효과가 있었다.

발의 움직임에 맞춰 팔을 흔들어 폴을 사용했다.

하지만 계곡을 가로질러 건너는 상황에서는

폴이 오히려 방해가 될 때도 있었다.


양손에 잡았다가, 한 손으로 몰아쥐었다가를 반복했다.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훨씬 체력 유지가 쉬웠다.





얼마 가지 않아 왼발에서 신호가 왔다.


어라, 내가 아픈 건 오른발인데?


오른쪽 발목을 보호하기 위해 테이핑을 했고,

하산 때를 대비해 무릎에도 테이핑을 했는데,

특히 왼쪽 무릎 테이핑을 너무 과하게 한 것 같았다.


앞쪽에서 너무 당겨져서인지,

왼쪽 햄스트링과 발바닥이 쥐가 날 것 같은 느낌이 났다.

올라가며 살짝 스트레치를 했지만 부족했다.


결국 혹시 몰라 챙겨둔 크램픽스를 뜯었다.

신 맛이 입 가득 퍼졌다. 생 식초를 마시는 느낌이었다.

기침이 나와서 물로 입을 헹궜다.

강렬한 맛이지만 효과는 직빵이었다. 잠시 지나자 쥐 나는 느낌이 가시기 시작했다.


힘들긴 했지만 그래도 오를만한 업힐이 이어지다가,

누군가 "와" 하는 소리를 내길래 고개를 들었다.


아, 깎아지른 듯한 진짜 업힐이 끝없이 이어져 있었다.

아무리 트레일런 대회라지만 도저히 뛰어갈 수 없는 구간이었다.


고수들도 여기서는 그저 쉬지 않고

올라가는 것에만 초점을 두는 것 같았다.

초보인 나는 안전한 완주를 위해 가다 서다를 반복했다.


아무리 힘든 길이어도 끝은 있다는 걸 알기 때문에,

잠시 한숨을 돌리고 나서는

또 한걸음 한걸음 앞으로 발을 내디뎠다.


앉아서 쉬었다가는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 것 같아

어딘가에 앉거나 기대지 않았다.

의지하거나 말을 건넬 동행인도 없었다.


그냥 혼자서 묵묵히 이겨낼 수밖에 없는 싸움이었다.

하지만 결국 나는 해낼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계속해서 올랐다.



마침내 보이는 정상.

출발한 지 3시간 30분 만이었다.

험했던 길에 비해 작고 귀여운 정상석에서 사진을 한 장 남기고,

다시 길을 재촉했다.


바로 하산이 아닌 옆 봉우리까지 가는 코스였기 때문에

온전히 즐기며 쉴 수 없었다.


영봉에서 주봉으로 넘어가는 길은 아주 힘들지 않았지만, 이미 지쳐 있었기 때문에 속도를 내기는 힘들었다.


뛰어가는 주자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열심히 옆으로 비껴 서면서

나는 차분히 내 갈 길을 갔다.


30분 뒤, 주봉에 도착했다.

이제는 하산길만 남았다.


내려가는 길에서는

무조건 잘 달려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나는,

6시간 제한시간 안에 들어가는 게 목표였는데 4시간 대에 들어가게 생겼네~

라고 생각해 버렸다.


어디서든 자만은 금물이다.

하산길은 내가 겪었던 어떤 길보다 험했다.



그리고 이미 4시간 동안 최대치의

근력, 근지구력, 심폐지구력을 소진해 버렸기 때문에

더 그렇게 느껴졌을 것이다.



수없이 많은 계단을 빠르게 뛰어내려 가다

집중력이 흐려지며 순간 현기증이 났다.


크고 작은 바위가 연달아 나와

왼쪽 오른쪽 할 것 없이 발목이 자꾸 꺾였다.


왼발은 그 와중에 다시 쥐가 날 것 같았다.


하지만 이젠 안다. 멈추면 안 된다.

옆에 누가 있어주지 않았기에 스스로 이겨내야 한다.


"집중해! 정신 차려!"

스스로에게 소리 내서 말했다.

한걸음 디딜 때마다 꺾이지 않기 위해

좀 더 단단해지려고 했다.


그렇게 다운힐을 내려오기 시작한 지 한 시간이 지났다.

대회 주자가 아닌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조금 더 달려 나가자 마지막 결승점이 눈에 들어왔다.


삑-


5시간 11분 34초. 21km 완주.


그렇게 나는 나와의 싸움에서 또 한 번 이겼다.


문경새재를 넘었다.

첫 번째 혼자만의 도전을 무사히 끝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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