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피의 법칙 - 비가 오거나, 아프거나
“또 비네.”
창밖을 보며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이번 주도, 지난주도.
내가 쉬는 날이면 어김없이 비가 내렸다.
마치 누군가 일부러 내 스케줄을 확인하고
비를 뿌리는 것 같았다.
대회까지 이제 한 달도 채 남지 않았다.
21km 문경새재 트레일런.
내가 처음으로 혼자 도전하는 난이도 높은 대회.
그런데… 훈련을 제대로 나갈 수가 없었다.
트레일러닝은 로드 러닝과는 다르다.
평평한 아스팔트를 달리는 것과
울퉁불퉁한 산길을 오르내리는 것은 완전히 다른 운동일 수밖에.
발목의 움직임, 하체 근육의 쓰임 등 모든 것이 달라진다.
그래서 산에서 뛰어야 하는데,
비가 오는 산길은 위험하다.
가뜩이나 발목 부상에서 회복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지금 시점에서는,
아무리 뒷산이라고 해도 비 오는 날까지 뛸 자신이 없다.
미끄러운 낙엽, 진흙 같은 흙길,
물에 젖은 나무뿌리까지.
한 발만이라도 잘못 디디면 크게 다칠 수 있다.
아무리 급해도 위험을 감수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대비는 해야지.”
나는 마이마운틴이 있는 헬스장 한 달 회원권을 끊었다.
마이마운틴, 경사를 조절할 수 있는 트레드밀.
완벽한 대안은 아니지만,
비 오는 날에도 언덕을 오르는 훈련을 할 수 있는
나름의 괜찮은 선택이었다.
기기에 저장된 프로그램들을 하나씩 돌려봤다.
Low level부터 시작해서 Mid, High까지.
경사도가 올라갔다 내려갔다를 반복하며
실제 산길처럼 변화를 줬다.
실내는 답답했지만, 움직이지 않는 것보다는 나았다.
땀이 흘렀다. 심박수가 올라갔다.
적어도 근육은 기억할 것이다. 산을 오르는 감각을.
그런데 뭔가 좀 이상했다.
뛰면 뛸수록 가슴이 쓰렸다.
처음에는 운동 때문인 줄 알았다.
강도가 세서 그런가, 피로가 쌓여서 그런가 생각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여느 때와 완전히 달랐다.
가슴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불 위에 올려놓은 쇠붙이처럼 뜨겁고 쓰렸다.
음식은 물론이고 물조차 넘기기 힘들었다.
목구멍을 지나갈 때마다 꽉 막히는 통증이 느껴졌다.
밥 한 숟가락을 삼키는 것조차 고역이었다.
이상한 건 그것만이 아니었다.
흉부가 뻐근하게 아프기 시작했다.
등까지 통증이 번졌다.
숨을 깊게 들이쉴 때마다 가슴 안쪽 어딘가가
꽈악 조이는 것 같았다.
밤에 누우면 더 심해졌다.
잠을 제대로 잘 수가 없었다.
“설마… 또?”
3개월 전 일이 떠올랐다.
동네 병원에서 식도이완불능증으로 오진하여,
처방된 약을 아무리 먹어도 낫지 않아 찾게 된
대학병원 소화기내과.
“역류성 식도염이네요.
스트레스 관리 잘하시고, 약 드세요.”
성실하게 약을 먹고, 생활습관도 바꿨다.
매운 음식은 끊다시피 하고,
커피는 빈속에 먹지 않았다.
그렇게 나아졌다고 생각했는데.
3개월 만에 다시 찾아온 통증은 전보다 더 강렬했다.
하지만 대학병원에 또 갈 시간이 없었다.
예약하고 기다리고, 검사받고…
그 시간이면 대회가 다 지나간다.
나는 급하게 집 근처 내과를 찾아갔다.
“증상이 심하네요.
기존에 드시던 약보다 강한 걸로 처방해 드릴게요.”
약국에서 받은 약봉지가 전보다 무거웠다.
약의 개수도, 용량도 늘어났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발걸음이 무거웠다.
대회를 포기해야 할까.
발목을 다쳤을 때 정형외과에서부터,
이번엔 내과에서까지 똑같은 말을 들었다.
“무리하지 마세요. 더 악화될 수 있습니다”
포기하고 싶지 않았지만,
지금, 내 몸이 계속 멈추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더 억울한 건, 그때부터였다.
창밖을 보니 맑았다.
예쁜 구름이 떠있는 쨍하니 맑은 하늘.
그동안 내가 쉬는 날마다 퍼붓던 비는 어디 갔을까.
하늘은 어느새 높아졌고, 바람은 시원해졌다.
가을이었다.
조금 추워지긴 했지만,
오히려 산을 뛰기엔 더 좋은 날씨였다.
너무 춥지도, 덥지도 않은 완벽한 온도.
습도도 낮아서 땀도 금방 마를 것 같았다.
그런데 나는 움직일 수 없었다.
약을 먹어야 하고, 몸을 쉬어야 하고,
자극적인 운동은 피해야 했다.
완벽한 날씨가 펼쳐진 바로 그 순간에,
나는 집에 갇혀 있어야 했다.
억울했다.
왜 하필 지금인가.
왜 비가 올 때는 멀쩡하다가,
날씨가 좋아지니 아픈 건가.
팔로우하는 SNS에는 가을 산행 사진들이 올라왔다.
단풍이 물들기 시작한 산길,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뛰는 모습들.
나도 저기 있어야 하는데.
약 봉투를 손에 쥔 채,
나는 창 밖을 보며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었다.
대회까지 한 달도 안 남았다.
제대로 된 훈련은 몇 번이나 했나.
날씨는 계속 나를 방해했고, 이제 몸마저 말을 듣지 않는다.
문경새재 21km.
과연 내가 완주할 수 있을까.
아니, 출전이나 할 수 있을까.
불안한 마음으로 그렇게 하루가 또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