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날 저녁 갑작스러운 소나기로 달리지 못했던 것이 내내 신경 쓰였다. 달리지 않았다고 뭐라 할 사람도 없는데 나와의 약속을 다른 외부요인으로 지키지 못한 게 억울했다. 하루종일 걸어 다니고 길을 헤매고 따가운 태양아래 이미 종일만 보는 거뜬히 걸었지만, 달리기를 해서 어플에 하노이에서 달렸던 족적을 남기고 싶은 마음이 먼저였다. 많은 이들이 저녁에 나와 뛰는 호안끼엠 호수를 달려보고 싶었다.
호텔에 도착해서 얼굴을 씻고 침대 끝에 앉자, 생각이 요동친다.
무릎보호대도 없고, 핸드폰 넣을 힙색도 두고 왔고, 가지고 온 보조가방은 달리면 덜렁거릴 텐데 오늘 하루 더 쉬는 거 어때? 어제도, 오늘도 충분히 무리했잖아. 바지도 딱 두 개뿐인데 어쩌려고?
마음이 요동친다. 배달앱을 훑어보니 오늘따라 도미노피자가 눈에 들어온다.
거대한 움직임. 침대 끄트머리에 걸쳐있던 엉덩이가 일어섰다. 보조가방 안에 잡동사니들을 모두 책상 위에 흩어놓는다. 가방 안에는 휴대폰, 방키, 생수 하나 사 먹을 잔돈 정도만 넣고 방을 나선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달리기 어플을 열었더니 또 다운로드를 하여야 한단다. 로비 와이파이로 하면 금방 되겠지.
다시 방으로 들어가려는 유혹을 뿌리쳤다. 1층 로비에는 누군가를 기다리는 외국인들이 여러 명 있었다. 그들 사이에서 달리기 어플을 작동시킨다.
호텔 유리창 너머로 다양한 사람들이 오고 간다. 화려한 복장을 한 대열 틈바구니에 껴서 호수 방향으로 그들과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이어폰을 출국 때부터 챙기지 않았다. 캐리어 없이 가는 여행이라 가방의 짐을 최소로 줄이고 싶었다. 달리는 동안 노래를 못 듣지만 얼마나 달렸고 한참을 달렸지만 여전히 한참을 달려야 하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도 고통이었다. 여유로이 거니는 관광객들 사이에서 혼자 다른 속도로 앞서 나갔다. 인도와 도로가 교차로로 자주 끊어지기 때문에도, 인도를 채우고 잇는 기념품 가게들의 매대와, 인도 곳곳에 앉아서 무언가를 마시고 있는 이들 때문에도 도로로 내려와서 움직였다.
아직 호수 근처는 오지도 않았는데 숨이 차오른다.
금, 토, 일 호수 주변을 통제하는 바리케이드가 설치되기 시작했다. 호안끼엠 호수 근처로는 차량진입이 불가능한 보행자 전용거리가 되었다. 뜻밖의 횡재.
다양한 방향으로 내달리는 오토바이가 없다면 훨씬 마음 놓고 달릴 수 있겠다는 생각에 신이 났다.
바리케이드를 지나 호수 근처로 들어서자 어마어마한 인파 속으로 들어갔다. 축제기간, 주말이 겹쳤는지 평소와 다른 분위기였다.
여유롭게 저녁을 즐기는 사람들 속으로 뛰어 들어갔다. 이제야 편히 달릴 수 있을 거란 생각과 달리 느긋하게 걷는 이들은 삼삼오오 모여 나란히 걸어가고 있었고,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면서 속도에 맞게 달려야 한다. 갑작스럽게 내 옆으로, 앞으로 튀어나오는 이들도 있기 때문에 전방 주시는 필수다.
축제기간이라 반짝이는 피사체들이 다양했다. 샛노란 용, 음악 소리에 맞춰 날갯짓하는 학, 소수민족으로 보이는 음악대의 행렬.
바퀴 달린 탈것들이 통제된 구역 안에서는 통제되지 않은 사람들이 다양하게 거닐고 있었다.
얼마나 사람들 사이를 헤치며 지나왔을까, 호수의 절반정도 온 분기점이 눈앞에 보였다. 여기를 돌면 반절의 성공이다. 얼마나 달렸는지 확인해 보려는 찰나, 앞쪽이 달리기 좋게 비어있다. 여기서 멈추기엔 아까워서 비어있는 구간을 좀 더 빨리 달린다.
왼쪽으로는 행사 부스가 줄지어 있고 저 앞쪽으로는 공연을 하는지 무대가 번쩍이고 있었다.
무대까지 가면 3/4 정도 온 셈이었다. 구경꾼들은 신기한 흥미거리에 무대 앞에 너도 나도 속도를 낮추며 모인다. 그들을 다시 뚫으며 시작점에 있던 용가지 뛰자고 마음먹는다.
이쯤이면 용이 나타나야 하는데 바퀴 달린 용은 어쩐지 더 멀리간 것만 같다. 간신히 호수 한 바퀴를 돌아 노란 용 근처에서 얼마나 뛰었나 봤더니 예상했던 시간, 거리의 절반 정도가 지났다. 이미 나는 충분히 힘든데 고작 달린 시간이 15분도 안되었다니.
여러모로 허무했다. 아무리 노력해도 속도의 한계는 이 정도가 최대치인가 하는 생각으로 머리가 차오르는데, 무릎 통증이 없었다. 고질적으로 안 좋았던 오른쪽 무릎은 코로나가 한참 힘해서 일주일 동안 이틀에 한 번은 걷고, 나머지는 달려서 무릎이 쑤셔 찾아간 의사 선생님은, 이렇게 하면 나중에 못 걸을 수 있다고 했다. 여러모로 운동을 포기할 수 없어 그때부터 무릎보호대를 차고 달렸다. 사실상 보호대 없이는 못 달린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런 오늘, 보호대 없이 10여 분을 1km 넘게 달렸는데도 통증이 없었다.
몸은 더 무거워졌지만 꾸준한 운동이 무릎을 단단하게 잡아준 것이구나.
이미 숨이 차 올랐지만 통증이 없다는 걸 깨닫자 더 달리고 싶었다. 5km를 달리거나 30분을 달리는 게 목표였으니 한 바퀴를 더 돌아보자. 한번 더 노란 용에서 출발했다. 주변을 돌아보니 달리는 사람이 몇몇 보였다. 첫 날 만큼 달리는 이들이 없어 서운하던 찰나에 인파 속으로 사라지는 그들을 보자 왠지 마음은 더 가벼웠다.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달릴 수 있기를, 끝까지 꼭 달리자. 마음속으로 되뇌며 달리기를 몇 십 번. 아까보다 더 많아진 인파에 몇 번을 잰걸음으로 서게 되지 힘이 풀려버렸다.
총 3.95km. 아쉬웠다. 조금만 더 달렸다면 4km는 채웠을 텐데. 체력과 끈기의 부족이 늘 아쉽지만 그래도 30분 전, 움직이지 않으려던 내가 큰 결심으로 이 정도 한 것에 만족하고 다음번을 기약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