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지글지글 목욕탕이 좋아
오늘은 하루종일 정신이 없었다. 버스를 내리면서 카드 찍는 것도 까먹고, 수건을 잘 챙기는 것도 까먹고, 보통은 수영 끝난 후 신발장의 위치를 대강이라도 기억하는데, 이번에는 아무 기억이 안 나서 헤매었다. 수영장에 일찍 도착했는데도 강습에는 2분 정도 지각을 하고, 샤워를 하면서도 ‘이제 다 했나? 아 맞다 폼클렌징 해야지, 이제 다 했나? 아 맞다 양치해야지,’ 이런 식이 될 만큼 내 샤워 루틴조차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강사님의 ‘오 좋아, 좋아, 그렇지’, ‘잘했어!’ 이런 말씀들은 자존감 낮은 이 시기의 나에게 정말 감사했다. 마구 가지고 싶었지만 하나도 얻지 못했던 성취감을 이곳에서 맛본다. 이렇게 사소한 움직임 하나로도 내가 갈구했던 것을 얻을 수 있다니. 이 세련되지 않은, 오래되고 넓기만 한 공간에서 그것을 찾을 수 있다니! (저는 물론 우리 수영장을 매우 좋아합니다^^, 실제로 우리 수영장은 매우 깔끔하고 잘 지어진 편입니다)
오늘은 평영 ‘팔 한 번, 다리 한 번’ 연습을 세 바퀴 정도 연습했다. 그런데 다들 되돌아오는 지점에서 “팔 한번, 다리 한 번이 도대체 뭐예요?? 어떻게 하는 거예요??” 이러한 반응. 나도 완전 마찬가지였다. 그거 도대체 어떻게 하는 건데! 팔/ 다리 따로 하는 것도 어려운데 이걸 어떻게 같이 하는 걸까??? 오늘따라 시간은 왜 이렇게 안 가는지, 시간을 이렇게 자주 확인한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그만큼 힘들고 어려운 강습이었다. 우왕좌왕하는 우리를 보자 선생님께서는 한 명, 한 명 지도해 주셨고 나는 이제야 조금 감을 잡은 듯한 상태에서 수업이 끝났다. 이대로 집에 가면 이 감각을 다음 시간에는 또 까먹을 것 같아서, 다음 수업 회원 분들이 오시기 전까지 한 바퀴 더 혼자 연습하니 정말 좋았다.
하지만 곧바로, 사람들이 연습 없이 바로 샤워실로 직행하는 이유도 알게 되었다. 샤워실에 자리가 없기 때문이었다. 기다리는 줄도 너무 길고, 도저히 내 순서를 가늠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라고 생각이 들었다. 샤워실을 나와 목욕탕으로 이동했다. 그런데 목욕탕은 앉아서 씻을 수가 있어서 좋고, 수영장의 샤워실처럼 빠르게 빠르게 바쁘게 바쁘게 씻는 우다다 분위기가 없어서 정말 좋았다.
또 하지만.... 다들 바구니를 하나씩 보유하고 있으시길래 ‘저 잇템 나만 놓칠 수 없지’ 하며 바구니를 찾으러 간 사이에 내 자리에 어떤 분이 오셔서 샤워기를 들고 몸을 씻기 시작하셨다. 내 물건, 수영복, 샤워용품 다 올려두고 왔는데! 급히 다시 가서 여기 자리 제 자리라고, 죄송하다고 말씀드리니까 “어이쿠!! 자리 없는 줄 알았네~” 하시면서 샤워기를 툭 내려놓으시는데, 내가 수건과 스킨케어 용품을 넣어두는 (즉, 물이 들어가서는 안 되는) 가방 속에 샤워기 분사가 샤야악- 내 마음속은 아아악-!! 되었다.
그래도 기왕 목욕탕에 앉게 된 핑계로 느긋하게 괄사비누로 전신을 풀어주었더니 시원하고 기분이 좋았다. 많이 뭉쳤을 것 같은 삼두와 승모를 위주로 괄사를 문질러주니 셀프 마사지 어렵지 않은 거였네! 나의 꿀팁은 비누망을 비누 끝에 감싸 비누망을 잡기. 괄사비누는 미끄러지는 게 큰 단점인데 이렇게 하면 잘 미끄러지지 않는다. 원래는 비누망에 넣어서 괄사비누를 사용하였으나 비누망이 너무 거칠어서 피부에 좋지 않을 것 같아 이 방법은 포기했다. 비누망으로 비누 밑부분(손으로 잡을 부분)을 감싸는 것 좋은 방법인 듯! 아무튼, 앞으로 샤워실에서 오래 기다려야 하는 날은 목욕탕으로 이동해 나에게 온몸 괄사 마사지를 선물하는 날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괄사 마사지를 해주고, 몸을 모두 씻고, 온탕에 들어가니, 딱딱한 얼음이 뜨거운 물에 녹으면 형체도 모르게 없어져 버리는 것처럼 하루종일 정신을 못 차리고 속상했던 마음이 흐느적 풀어져 나갔다. 조금만 더 따뜻하면 좋겠어서 열탕으로 이동해 몸의 떨림을 느꼈다. 지글지글.. 몸 안의 피로가 따뜻한 물과 만나 순환되는 느낌, 고여있던 나쁜 기운이 바깥으로 빠져나가는 느낌, 딱 좋다! 나를 자학했던 생각들이 사라지고 아무 생각이 없어진다. 편안하다. 오늘 하루는 ‘우당탕탕-‘, ’아이고’의 연속이었지만, 수영장에서의 단 세 시간 덕분에 오늘을 아늑하게 간직할 수 있게 되었다.
코 밑까지 몸을 담그고 속으로 1분을 정확히 세고는 탕 밖으로 나왔다. 몸은 나른 나른한데, 머리가 깨질 만큼 시원한 물까지 두 잔 연속 마셔주니 이보다 완벽할 수가 없었다. 스킨케어를 하며 내 최애템인 우드 괄사로 두피괄사와 얼굴 괄사까지 해 주니, <운동+ 전신괄사+ 열탕+ 두피괄사+얼굴 마사지>라는 세기의 부기 완화 조합 덕분에 얼굴이 홀쭉해졌다. 우리 엄마가 내 얼굴을 보고 항상 달덩이, 보름달이라고 부르는데 내 얼굴도 이렇게 갸름할 수가 있는 거였냐고. 사람들이 왜 반신욕을 하라는지 알 것 같다. 붓기 빼는 데에 목욕탕만큼 좋은 게 없는 듯.
마지막으로 한 아주머니께서 나에게 오셔서 내 앞에 있는 드라이기 쓰시는 거죠?!라고 물어보셨고, 저는 다 썼다고, 가져가셔도 된다고 하니까 활짝 웃으면서 감사하다고 해주셨다. 사실 내 드라이기도 아닌데. 왜 마음이 포근하고 뿌듯한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