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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연 Sep 17. 2024

과거로 돌아간다면

: H에게

 유난히도 지난 일이 자주 떠오르는 날이 있다. 그런 날이면 너는 칠흑 같은 바닷속으로 침잠하듯 아래로, 저 아래로 가라앉아 버리고 만다. 다 괜찮아졌다 싶다가도 그렇게 어제 일처럼 떠오르는 과거들은 네 발목을 휘감고, 그렇게 너는 과거에 잠식당한다. 남들처럼 살아간다는 일이 이다지도 어려운 것인지 몰랐다. 유난히도 깊고, 낮았던 너의 바닥은 언제라도 너를 집어 삼킬 듯 저 아래서 입을 벌린 채 너를 바라본다.


 그렇게 그가 과거에서 생생한 너의 현실로 되살아 나면 너의 세상은 다시 색을 잃고 흑백으로 뒤바뀐다. 그때의 그는 분명 빛이었으나, 지금은 너의 색을 야금야금 좀먹는다. 그때는 그래도 좋다고 생각했다. 빛도, 산소도 존재하지 않는 심연 속에서, 색을 찾는 일 따위는 사치에 가까웠고, 넌 그저 그를 통해 숨을 쉬었다.  


   

 너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 그저 너를 벼랑 끝으로 내몰고, 그는 너의 유일한 동아줄. 제발 이 줄 하나만은 지키게 해달라고, 이번 한 번만 내 소원을 들어달라 믿지도 않던 신에 대고 그렇게도 처절히 빌던 네가 있었다. 그리고 지금의 네가 있는 건, 믿었던 너의 동아줄이 툭 끊어져 버렸기 때문일까, 아니면 오히려 그 소원이 처절하게도 이루어졌기 때문일까.   


  

 그 이후로 한참을 과거에 살았다. 앞으로 나아가겠다, 뒤처지지 않겠다 늘 말은 했지만, 사실 너는 단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하고 과거를 되새김질했다. 그 중엔 분하고 억울했던 너의 환경에 대한 것들도 많았지만, 네가 가장 많이 붙들고 있었던 건 역시 그 사람이라는 걸 너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처음엔 애잔했고, 두 번째엔 아팠고, 세 번째엔 포기했다. 세 번째까지 오기 제법 오랜 시간이 걸렸으나, 아이러니하게도 너는 그 사람으로 인해 그 사람을 온전히 포기했다.     



 그리고 이제야 네 번째의 삶을 살아나가는 네가 있다. 너는 치열하게 살아가고, 과거 따위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하루를 채우며 살고 있다. 그 사람을 좇느라 잃어야 했던 긴긴 시간들이 아쉬워 더욱 악착같이 살아가는 너를 보며, 나는 이제야 네 삶이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 사람을 사랑할 때만큼 간절하진 않으나, 그 사람을 사랑할 때보다 너의 삶을 사랑할 수 있는 지금이 맞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얄궂게도 그 사람은 또다시 너를 찾아왔다. 보고 싶어선 안 되는 사람이 보고 싶었던 어느 새벽 날, 막상 그 사람이 네 앞에 있었다면 이다지도 애타지도 않을 주제에 하염없이 과거에 붙들려 가슴 아파했다. 여전히 네가 듣는 모든 노래 속에 그의 존재함을 깨달으며 울었다. 날이 선 칼같은 과거가 느릿하게 너를 타고 오르고 상처를 입은 넌 또다시 네 주제 파악을 한다.     


 그리고 또 다시 지난밤, 빗속에서 그를 원 없이 원망하고 그리워하던 네가 있었다. 이제 와 편지도, 전화도 그 무엇도 하지 않을 주제에 비련의 여주인공 마냥 처절히 무너지는 네가 우스웠다. 네가 찾는 사랑은 더 이상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너도 알고 지금의 나도 아는 뻔하디 뻔한 이 말을 꼭 하고 싶었다.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삶이 지쳐 그만 모든 걸 멈추고 싶었던 너에게. 행복도, 희망도 아무것도 필요없다며 울던 너에게. 보드라운 손길로 가만히 쓰다듬어 주며. 따스한 눈빛과 함께.     



 ‘미래의 네가 애써 위안삼고 있는 행복은 한순간 녹아 없어질 한 여름밤의 꿈. 결국 너는 죄책감에 너 자신을 괴롭히고 있을 뿐이잖아. 너는 그저 벌을 받고 싶을 뿐이잖아. 그러니 이제 그만 정신 차려.’



 과거는 무너지고, 미래는 이제 그만 자각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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