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킷 23 댓글 공유 작가의 글을 SNS에 공유해보세요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예민함이 피어올린 자리

혼돈과 질서 사이에서 쓰는 삶

by 제로 Mar 24. 2025

글을 쓰고 싶어 펜을 들고 노트를 펼쳤다. 오늘만 동화를 세 편이나 썼는데도, 여전히 더 쓰고 싶어 손이 근질거린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들을 몇 줄씩 적어 내려가 봐야겠다. 그동안 올렸다 지운 글이 240편을 훌쩍 넘겨버렸다. 물론 내 글이 대체로 짧아 편수만 많아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글 한 편당 대략 1,000자 정도라고 가정하면 이미 24만 자를 훌쩍 넘겼을 테니, 책 한 권은 써낸 셈이 아닐까.


지운 글들이 아깝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차라리 지우길 잘했다고 느끼는 글도 있으니 말이다. 내 성격이 조금 날카로운 편이기도 하고, 어쩌면 그런 글들을 지웠기에 더 나은 241번째부터 265번째 글을 쓸 수 있었던 것 같다. 말 그대로 지워진 글들이 ‘거름’이 되어, 이후에 쓴 글들이 ‘꽃’으로 피어났다.


장자의 「추수」 편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다. 수릉에 사는 한 젊은이가 자기만의 걸음걸이를 버리고 조나라의 수도 한단으로 ‘걸음걸이’를 배우러 떠났는데, 결국 한단의 걸음걸이를 제대로 익히지도 못하고 자기만의 걸음걸이까지 잊어버려 기어서 돌아와야 했다. 이 이야기를 읽으면 “남들이 사는 방식을 지나치게 좇다가, 정작 나 자신이 누구인지 잊어버리게 되지는 않을까?”라는 물음이 떠오른다.


나에게 글쓰기의 원동력은 예민함, 상처, 그리고 연약함이었다. 그런데 요즘 몸이 점점 건강해지고 예민함이 치유되고, 상처가 아물어가다 보니 책임과 의무가 더 선명하게 보여서인지 글쓰기가 한결 어려워지는 기분이다. 몸과 마음이 건강해지는 것은 분명 좋은 일이지만, 내 안의 예민함이 사라지면 작가지망생인 나의 에너지는 과연 어떻게 될까, 스스로에게 묻지 않을 수 없다.


이때, 니체가 말한 ‘낙타-사자-아이’ 비유가 다시 떠오른다. 무거운 책임과 의무를 짊어진 낙타에서, 자유롭고 용맹한 사자로 변해, 궁극적으로 아이처럼 긍정적이고 천진난만한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것. 글쓰기는 언제나 나에게 쉽지 않은 과제였지만, 특히 몸과 마음이 회복될수록 글이 멈추는 기분이 드는 건 아이러니하다. 예민했던 감정들이야말로 내 언어를 깨우고, 삶을 관통하는 통찰을 이끌어낸 강력한 힘이었기 때문이다.


한때 건강을 해쳤던 커피를, 특히 샷을 추가한 음료로 세 병쯤 마시고 나면 잃었던 예민함이 다시 솟아나는 것을 느낀다. 마치 커피의 쓴맛이 마음속 깊숙한 곳을 건드려, 무뎌졌던 감각을 다시 세워주는 듯하다. 너무 무거운 혼란도, 지나치게 완벽한 질서도 글쓰기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혼돈과 질서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걸으며, 예민함이라는 부채를 한 손에 든 채 줄타기를 해나가는 것—그것이 바로 내가 생각하는 ‘창작’이라는 여정의 핵심이다.


디오니소스적인 혼돈과 아폴론적인 질서가 조화를 이룰 때, 비로소 ‘카오스모스(Chaosmos)’가 탄생한다. 나는 이 혼종의 아름다움이 예술의 진정한 본질이라고 믿는다. 예민함은 수없이 스쳐 지나가는 자극과 감각, 그리고 그 바다 같은 정보 속에서 본질과 질서를 길어 올리는 힘이다. 그것이야말로 나를 움직이게 했던 진정한 동력이며, 세상을 글로 표현하게 해준 핵심 가치다.


건강한 삶은 내 시선을 한층 높여, 담담하고도 고귀한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만든다. 동시에, 삶의 밑바닥까지 내려가 본 사람이기에 더욱 간절하고 선명하게 ‘위를 향한 풍경’을 그려낼 수 있지 않을까. 역설적이지만, 내가 건강하지 않았을 때 썼던 글들이 더 예술에 가까웠다고 느껴지는 이유는, 그 밑바닥에서 본 하늘이 너무나 간절하고도 맑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나는 오늘도 펜을 들고 노트를 펼친다. 이미 지워버린 수많은 글이 나를 거름 삼아 더 나은 문장을 피워낼 것이라는 믿음, 혼돈과 질서 사이를 오가며 예민함을 놓지 않고 줄타기를 할 것이라는 기대—이 둘이 바로 내가 글쓰기를 멈출 수 없는 이유다.


브런치 글 이미지 1
이전 25화 마지막으로 닿은 섬, 반성과 책임 그리고 사죄

브런치 로그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