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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군 Sep 25. 2024

[단편소설] 치약과 우유 2

  그 시절 서울 대학가 근처에 살았던 나는 자주 입을 막고 다녔다. 멀리서 무언가 터지는 소리가 들렸고, 잠시 후 보이지 않는 것이 눈과 코를 찔렀다. 5월의 하늘은 맑고, 햇볕도 따뜻해서 학교가 끝날 시간에는 거리에 사람들이 넘실거렸다. 서점과 문방구, 중고책방, 오락실, 이발소, 분식점, 복덕방 등 교문을 나오면 길게 뻗은 길 좌우로 상가들이 줄지어 있었다. 문방구 앞 간이 오락기 앞과 분식점 앞 작은 의자에는 학생들이 줄지어 있었다. 어디에서 왔는지 알 수도 없고 보이지 않는 매운 냄새가 살에 닿는 순간, 긴급 재난 문자 알람처럼 여기저기에서 기침 소리가 들렸다. 도로 주변의 상가 주인들은 서둘러 열린 문을 닫았고, 사람들은 손으로 입과 코를 막고 뛰거나 그 자리에서 재채기를 멈추지 못했다. 마라탕이나 매운 고추를 먹은 것도 아닌데 길을 터벅터벅 걷다가, 훅하는 느낌의 싸한 무엇인가가 코를 강타하고 잠시 후 눈을 뜰 수 없는 쓰라림이 온다면 얼마나 놀라겠는가! 하지만 그때는 어렸고 집에 책가방을 놓고 빨리 놀고 싶다는 생각에 집으로 달려가 마당에 놓인 대야에 물을 받고 세수를 했다. 물론 얼굴에 물이 닿으니 더 매워서 소리를 질렀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눈을 비비며 집 밖으로 뛰쳐나갔다. 

  중학생 1학년이 무슨 할 일이 많을 것 같냐고 생각하겠지만 오락실에 가서 매일 게임 순위를 확인하고, 동네 중고책방에 가서 보물섬 과월호가 헐값에 나왔는지 보고, 몰래 만화책을 읽거나 동네 아이들과 밤늦게까지 공을 차느라 밥 먹을 시간이 없었다. 오래된 2층과 3층짜리 주택이 오밀조밀 모여있는 골목길은 적은 인원이 축구하기에 알맞았다. 가끔 남의 집 담벼락으로 공이 넘어갔는데, 문이 잠겨 있는 담을 넘어가 공을 들고 살금살금 대문으로 나오다 주인에게 걸리면 공을 들고 튀기 바빴지만, 뛰면서도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간혹 조용한 아이들은 집에 틀어박혔고, 이성에 빨리 눈을 뜬 친구들은 신촌이나 이대로 돌아다녔다. 나 역시 비가 오는 날에는 집에 머물렀는데, 형이 물려 준 (소니 카세트 플레이어가 아닌) AIWA 카세트 플레이어에 카세트테이프를 넣고 라디오에서 좋은 음악만이 나오길 기다렸다가 녹음 버튼을 눌렀다. 카세트테이프는 레코드가게에서 파는 공테이프가 아닌 형이 듣던 민병철 영어 테이프에 스카치테이프로 영어 테이프 바닥에 작은 구멍을 막아 녹음했다. 경태가 알려준 팁이었다. 그렇게 공테이프를 사지 않고 남은 돈으로 나는 오락실에 가거나 프라모델을 사서 몰래 만들었다. 하지만 꼬리가 길면 들키는 법인데, 아직 세상 사는 이치를 깨닫지 못한 나는 요령을 피우다 혼나기 일쑤였다. 

  "야. 이거 누가 영어 테이프에 음악 녹음했어?"

  형은 방에서 소리쳤다. 당연히 범인은 나라고 생각하면서, 엄마에게 소리쳐서 너를 혼낼 수 있다는 의도가 깔려 있었다. 영어 테이프는 형에게 발각되어 돈 몇 푼으로 입막음했지만 평화로운 시간은 며칠 못가고, 성질난 형이 고자질해 엄마에게 등짝을 맞았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형은 녹음 기능을 없애기 위해 AIWA 카세트 플레이어를 분해했고, 이과생이지만 기계와 담을 쌓고 지내는 형은 카세트 플레이어를 라디오만 들리는 반쪽짜리로 만들었다. 고자질한 것도 모자라서 카세트를 망가트린 형이 용서되질 않아 카세트를 집어던지며 형에게 대들었지만, 엄마는 버릇없다는 이유로 나를 혼쭐 냈고, 너는 커서 뭐가 되려고 그러냐고 잔소리만 퍼부었다. 엄마한테 혼난 날이며 저녁 식사 시간이 길어졌다. 나는 밥그릇에 코를 박고 아빠의 훈계를 들어야 했다. 그런 날은 내 방에서 공부하는 척해야 했다. 책상 위에 연습장을 꺼내서 형의 이름을 빨간 글씨로 쓰거나 고자질한 인간하고는 상종하지 말자는 낙서를 하며 시간을 보내다가도 대문 밖에서 빵진아 놀자고 친구들이 내 별명을 부르면 조용히 방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마당에서 세수하는 척하다가 몰래 밖으로 나가 공터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았다. 놀기에도 바쁜 시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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