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연주 Sep 03. 2023

미끄러지듯 나아가는

열심히 돌아다녔습니다. 사람들은 제게 적응력이 뛰어나다 말했고 저는 한껏 의기양양했습니다. 어디에 있어도 살아남을 자신이 있었습니다. 체험하고 배우는 일은 저를 기쁘게 만들었습니다. 몰랐던 언어를, 행동을, 사고를, 지식을 모두 스스로의 것으로 만들면 만들수록 저는 위대해졌습니다.


위대함은 별 다른 계기 없이 무너졌습니다. 들인 공이 무색하게도 그것이 무너지는 데에는 눈꺼풀이 열리고 닫히는 시간도 걸리지 않았답니다. 어느 날 아침 저는 눈을 뜨며 모든 것은 자아도취적 흉내 내기에 지나지 않았음을 실감했습니다. 다시 눈을 감으며 이때껏 저의 것이라고 당당히 자부했고 또한 단단히 착각했던 것들과 작별했습니다. 결국 저는 그 어떤 것도 저의 것으로 만들지 못했고, 다만 저의 것으로 보이게끔 만들었을 뿐이었습니다. 가여운 마음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가여움은 마침내 시작부터 꼬여버린 것들을 향했지요.


어쩌면 저는 정착을 하고 싶었을지도 모릅니다. 어디를 향하는지 모른 채로 당장 주어진 것들을 해결하는 일은 어렵지 않답니다. 발붙일 곳이 없음을 더 이상 슬퍼하지 않습니다. 돌아다니는 삶은 한 가지 깨달음을 주었는데 그건 바로 그 어디에도 저의 자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때때로 스쳐가는 사람들에 어긋난 관심을 보이곤 했습니다. 그들이 욕망하는 것을 따르다가 이윽고 흥미가 식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헤어졌습니다. 그럼에도 따지고 보면 많은 날이 지나지 않았지요. 현실이 농담과 다를 것이 무엇일까요.


주말을 맞이하고 마음은 꽤 고요합니다. 천국과 지옥을 왔다리 갔다리 이제는 지겹지도 않답니다. 환상적인 후회도 줄어들고 있다네요. 사실은 사랑에 목매는 편이라 그렇습니다. 믿거나 말거나 저는 모두를 사랑하고 있답니다. 전에는 시간이 지나도 끝난 것들에 대한 미련은 영원할 것이라 생각했는데요. 그랬던 시절도 끝이 나기는 납니다. 인식 자체가 불가한 방향으로 흐르는걸요. 인생을 걸었다가도 마음이 바뀌면 없는 일이 될 수 있는 것을 진심으로 받아들입니다.


각설하고 저는 눈에 보일 때가 많습니다. 가망의 유무가 보이는데요. 생각은 사실이 아니라지만 제 생각은 보통 사실입니다. 한눈에 가망이 없으면 대부분 영영 가망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제가 희망을 놓지 못하고 가망이 없는 것에도 노력을 들이니 그야말로 호구를 자처합니다. 그렇습니다. 개선을 믿지 않으면서도 강하게 추구하고 있습니다. 저는 기본적으로 무엇이든 마음에 들지 않는 까탈스러운 사람입니다. 이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머리를 지배하고 있다네요.


다양한 상황을 마주했습니다. 마음에 안 드는 것을 꼭 저의 마음처럼 고치고자 애를 썼습니다. 혹자는 저더러 폭력적이라 했습니다. 애초에 잘못되었다는 것 자체가 결국 저의 주관에 따라 형성된 것입니다. 모두를 위해서가 아닌 저 자신을 위해 행동했던 것이지요. 고침을 당하는 입장은 꽤나 피곤했을 것입니다. 불행 중 다행 혹은 다행 중 불행으로 저는 임계점에 이르면 확 포기를 해버리고 대부분의 경우 무엇도 바꾸지 못한 채로 이동을 택했습니다.


울타리가 싫으면 어쩌겠습니까. 싫은 사람이 떠나야 합니다. 자연스럽게 바뀌는 것은 없고 지금은 다만 흘러가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낯가림이라고는 전혀 없어 보인다는 말을 꾸준히 듣는 중입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곳에 떨어져 부딪히다 보니 흉내내기 하나는 자신이 있답니다. 꾸역꾸역 뿌리를 내리고 싶어서 열심히 웃었으나 작별을 피할 수는 없더라요. 금세 대체될 수 있는 관계는 슬프웁니다. 하지만 감정이 넘치는 것은 언제나 저뿐이라는 것을 잘 알지요.


언제부터일까요. 사랑하며 증오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영원이란 없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저를 사랑했던 예전의 그가 떠나저는 새롭게 사랑할 그를 찾습니다. 새로운 그가 저를 사랑할 즈음에는 드문드문 작별을 떠올니다. 아아 이상과 현실의 괴리로부터의 추락은 끝이 없습니다. 모든 것들의 얼굴은 감히 뭐라 말할 수 없이 옅어지고 저 역시 다를 것 없겠지요. 때때로 몸이 하얀 알비노 악어를 생각합니다. 저는 언젠가 그를 한참 바라보았던 적이 있었는데요. 어언간 악어가 저를 바라보고 그 순간 모든 메타포가 사라졌습니다. 복잡했던 감정은 간데없고 안에서도 밖에서도 낯선 노래가 울리고 있습니다.

이전 01화 잃어버리면 버릴수록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