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존 멕켄지 선교사(1861~1895)는 캐나다 장로교의 밀알이 된 선교사이다. 독립 선교사로 내한하여 황해도 소래에서 한국인과 똑같이 생활하며 복음을 전하였다. 그러나 일사병에 걸려 내한한 지 1년 6개월 만에 순교하였다. 그의 순교로 인해 캐나다 장로교 선교부는 100여 명의 선교사를 한국을 파송하고 그의 정신을 계승했다.
그는 캐나다 동부 노바 스코티아 주의 케이프 브레튼 섬에서 태어났다. 달하우지 대학을 졸업하고, 1888년 캐나다 북쪽 벨섬(인디언 지역)에 가서 1년 반 동안 선교 활동을 하였다.
그 후 1891년 할리팍스의 파인힐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는 한국 선교사의 전기를 읽고 감명을 받아 한국 선교를 결심하였다.
그러나 캐나다 장로교 선교회에서는 재정 문제로 정식 선교사 파견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래서 독립 선교사로서 1893년 12월 32세의 나이로 한국에 왔다. 그의 모교회인 찰머스 교회 및 브라가 선교회(약혼녀 맥컬리의 아버지가 운영하는 선교회)가 모금한 후원금을 가지고 한국에 온 것이다.
* 찰머스 교회에서는 맥켄지 순교 이후 휴 밀러 등 많은 한국 선교사를 파견한다.
그는 한국에 도착해서 한국어를 배우고 기존 선교사와 교제하면서 한국 생활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894년 2월부터 황해도 소래에 거주하면서 사역을 시작하였다. 소래교회는 1886년 서상륜과 서경조 형제가 세운 한국인 최초 교회이다.
멕켄지는 외국인 거주 지역에서 거주하며 선교하는 일반적인 선교 방식에서 벗어나, 한국인처럼 살면서 한국 문화와 동화하는 전도 방법을 택한다. 초가집에 거주하고 한복을 입고 한국 음식을 먹으며 그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매일 인근 농촌을 다니며 전도했고, 교육에도 힘을 기울였다. 1895년 2월 그의 집에서 김세학당(남녀공학의 최초)을 세워 성경 말씀 및 언문을 가르쳤다. 이 학교는 그의 순교 기부금으로 해서 제일학교로 발전하였다.
1895년 6월에는 8칸의 기와집으로 예배당을 증축하여 더 많은 성도들이 예배를 볼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동학군에게 사랑을 베풀어 복음을 전하였다. 처음에 맥켄지를 적대시하던 동학군들도 생명이 위급한 동학군을 치료하고 돕는 것을 보고 감동하여 예배에 참석했다.
그러나 무리하게 지역 전도활동을 강행하여 일사병에 걸리고 말았다. 근처 장연읍 지역을 전도하였는데 열 시간 이상 태양빛 아래 걸어서 다닌 이유였다. 당시 그는 예배당 부속실에 홀로 거주하였는데 의사가 없는 상태에서 5일간 고열에 시달리다 정신착란 현상이 발생하여 스스로 권총으로 자신을 쏜 것이다. 1895년 7월 그는 하나님 나라의 부르심을 받았다.
6월 23일 그의 일기장에 기록한 마지막 글이 심금을 울린다. <나의 마음은 더 이상 기대할 수 없을 정도로 편안하다, 예수님은 나의 유일한 희망이다. 그러나 나의 몸은 고통이 심해서 더 이상 글을 쓸 수 없다. 그러나 죽음이 아니길 바란다. 내가 한국인과 살았기 때문에 이렇게 되었다고 말하게 될 많은 사람들 때문이다. 내가 조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낮에는 뜨거운 햇볕 아래 전도하고 밤이면 공기가 추워질 때까지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어머니에게 편지를 썼다. <예수님 만이 유일한 희망입니다. 어머니 더 이상 글을 쓸 수가 없습니다. 너무 아픕니다. 어머니>
그의 희생적인 삶을 본 소래지역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였다. 그는 소래에 묻혔으며, 그의 약혼녀 맥컬리 양이 세운 비석에는 <주의 말씀에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으면 열매가 많다 함이 옳도다, 소래교회는 조선의 처음 열매요 목사의 몸은 여기 자도다>로 기록되어 있다.
멕켄지의 죽음을 듣고 언더우드와 웰즈 선교사가 소래로 와서 장례를 치르고 그곳 성도들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이때 세례 받은 사람 중에는 제1회 세브란스 의대 졸업자 김필순과 여동생 김필례(한국 교회 여성 지도자)가 포함되어 있었다.
멕켄지가 죽은 후 서경조 목사를 포함한 주민 일동은 캐나다 장로교 선교회에 편지를 보내어 선교사를 요청하게 된다. 그 결과 캐나다 장로교 선교회는 한국 선교를 결정하게 되고, 1898년 5명의 선교사(그리어슨 부부, 푸트 부부, 멕레)의 파견을 시작으로 100여 명의 선교사가 한국으로 파견되었다.
그의 약혼녀 루이스 맥컬리는 한국으로 오다가 맥켄지의 비보를 접하게 된다. 그녀는 소래에 와서 멕켄지의 비석을 세우고 유산을 정리하여 3천 불을 소래교회에 헌금하였다. 그녀도 1900년 한국 선교사로 와서 평생 독신으로 지내며, 원산과 함흥을 중심으로 사역하였다. 한국 최초 여자 신학교인 마르다 윌슨 여자신학교를 설립하고, 여 전도회를 창설하는 등 여성 선교 및 교육에 평생을 헌신하였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