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늘 가슴속에만 간직하던 진이 씨를 단둘이 처음으로 만나는 날이다. 커피숍에서 그녀가 오기를 기다리며 흘러나오는 벚꽃엔딩이라는 노래를 따라 흥얼거리며 더디게만 가는 시계만 쳐다보고 있다.
진이 씨는 같은 회사에 근무하는 직원으로 단정한 모습과 회사 내의 보기 드문 외모를 가졌으며 항상 남을 먼저 생각하는 따뜻한 여자이다. 맨날 멀리서 바라만 보다 부서 회식날 거하게 취한 나를 옆에 두고 입사동기인 남 과장이 사무실 내에 진이 씨를 좋게 생각하는 아주 착하고 멋있는 남자가 있는데 알고 있냐며, 그 사람에게 관심 좀 가져달라며 농담같이 이야기를 하였고 그 말에 술기운이 달아오른 얼굴이 더욱더 붉어진 그녀는 “어머, 그런 사람이 있어요? 그럴 리가요. 누군지 이야기 좀 해줘요. 저는 전혀 못 느꼈는데? 술 마셨다고 농담하시는 거죠? ”
“참 눈치도 없으시네. 바로 앞에 있는 사람도 못 알아봐요? 회사직원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을 정작 본인이 모른다는 게 말이되요?” 웃으며 이야기하는 남 과장의 팔을 잽싸게 잡으며 “이 친구가 술이 많이 된 것 같은데 제가 데리고 들어갈게요.” 남 과장을 밖으로 끌고 나오며 왜 쓸데없는 이야기를 해서 사람 망신을 주냐고 화를 내니 남 과장은 피씩 웃으며 “이 과장이 진이 씨를 많이 좋아하긴 하나 보네 이렇게 과민반응 하는 걸 보니, 보아하니 진이 씨도 너를 싫어하는 눈치는 아니던데 한번 데이트 신청 해봐라. 지원사격 필요하면 이야기하고.” 호탕하게 다시 한번 웃으며 택시를 타고 사라진다.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고 하늘을 쳐다보니 달 빛이 오늘따라 유난히도 빛나 보인다.
“이 과장님. 다 좋은데 담배 좀 끊으세요. 항상 몸에서 좋은 향이 나는데 꼭 담배 피우고 사무실 들어오시면 그 좋은 향이 안 좋은 향으로 바뀌어 버려서 싫어요.” 언제 와있었는지 진이 씨가 내 옆에 서 있으며 말을 건넸다. “아, 그래요? 죄송합니다. 그냥 동료들과 밖에서 이야기할 때 심심풀이로 피웠는데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가 갔는 줄은 몰랐네요. 당장 끊도록 하겠습니다.” “피해라기보다는 걱정도 되고 좋은 향이 사라지는 것 같아 아쉬워서 그래요. 이 과장님 금연 성공하시면 저한테 이야기해 주세요. 성공 기념으로 제가 맛난 거 살게요.”라는 말만 남기고 부끄러운 듯 붉어진 얼굴을 감춘 채 지하철 역 쪽을 향해 뛰어간다.
커피숍에서 진이 씨와 단 둘이 앉아 이야기하는 건 처음이라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할 때 침묵을 깨고 진이 씨가 먼저 말을 꺼냈다.
“설마 금연하실 줄은 몰랐어요. 그래도 성공하셨다고 저한테 먼저 말씀해주셔서 저도 기분이 좋았어요. 오늘 저녁은 제가 살게요” “아니에요. 제가 사야죠. 어떻게 보면 진이 씨 덕분에 저도 결심을 한 건데요. 고맙습니다.”
“근데 이 과장님은 향수를 어느 제품을 사용하세요? 항상 좋은 향이 나는데 처음 맡아보는 향이라 항상 궁금했었거든요. 자꾸 사람을 생각하게 하는 향이라 할까? 하여튼 너무 좋은 것 같아서요.”
“아뇨. 저는 향수를 전혀 사용하지 않아요. 사람들이 저한테서 냄새가 난다고 하긴 하던데 저는 잘 모르겠더라고요. 좋게 봐주시니 저도 기분이 아주 좋네요.”
“어머, 그래요? 그럼 이 과장님 땀에서 향기가 나는 거예요? 땀 모아서 향수병에 넣어 팔면 아주 대박 나겠네요. 호호호호”
중학교 다닐 때쯤으로 기억을 한다. 하교 후 집으로 가는 길에 이상한 광경이 눈에 띄었다.
어느 할어버지 한분이 아주 멋진 하얀 양복을 입으시고 빨간색 넥타이까지 두르셨는데 정작 폐지가 한가득 담긴 리어카를 힘겹게 끌고 가시는 게 아닌가. 전혀 어울리지 않은 복장으로 이런 일을 왜 하시는지 너무 희한한 광경이었다. 그러다 조금 가파른 오르막길을 오르시다 리어카가 뒤로 조금씩 밀리는 것이 아닌가. 나는 달려가 뒤에서 리어카를 밀기 시작했다. 오르막길을 다 올라가서야 할아버지는 내쪽으로 돌아보시며 “네 덕분에 쉽게 올라왔네. 고맙다. 이 근처에 사냐? 처음 보는 것 같은데.” “아. 네. 저희 집은 한참 더 올라가야 돼요. 학교 말고는 밖에 잘 안 나와서 저도 아는 사람이 별로 없어요. 근데 할아버지 어디까지 가세요? 제가 가시는 데까지 도와 드릴게요.” “그래? 이렇게 고마울 수가. 오늘 중요한 곳에 가야 되는데 갑자기 폐지 가지고 가라는 연락을 받아서, 아까워서 포기도 못하고 얼른 일하고 갈려고 했는데 이렇게 늦어졌네. 학생 미안하지만 저 언덕 위까지만 좀 도와줘.”
할아버지와 나는 폐지와 다른 고물이 한가득 실린 리어카를 낑낑대며 힘겹게 끌고 가다 보니 어느새 할어버지 집 앞까지 다다랐다. 할어버지는 연신 고맙다며 이제 괜찮으니 집으로 어서 가라고 하셨지만 이왕 도와드린 거 끝까지 도와 드려야겠다는 생각으로 “어차피 집에 가봐야 할 것도 없는데 제가 마저 도와 드릴게요. 이거 어디다 내려놓으면 돼요?” “아이고. 학생 고마워. 혼자 해도 되는데 오늘 시간이 별로 없어서 염치없지만 부탁 좀 할게. 저기 창고에 넣으면 돼.”
할아버지가 리어카에서 종류별로 꺼내서 나한테 주시면 나는 좁은 창고 안에 폐지는 폐지대로 고물은 고물대로 차곡차곡 넣기 시작했다. 보기에는 얼마 안 되는 양 같았는데 막상 풀어서 적재하다 보니 양이 엄청 많았다. 그러다 창고 안 고물 속에 하얀 물병 같은 게 보였다. 혹 할아버지가 마시는 물인가 싶어 할아버지에게 건네며 “할아버지 드시는 물이에요? 좀 드시고 일하세요.” “엥? 이게 왜 여기서 나오나? 한참 동안 보여서 누가 훔쳐간 줄 알았는데, 물은 아니고 예전에 우리 할멈이 나이가 먹으면 몸에서 노린내가 난다며 항상 뿌려준 거였는데. 이게 어디서 나타난 거야?”
“여기 창고 폐지 밑에 깔려있던데요. 찾아서 할머니가 좋아라 하시겠네요.”
“이제 할멈은 없어. 멀리 갔어. 학생 나 도와준다고 땀나서 냄새 날건대 이리로 와봐. 이게 뭔지는 몰라도 할멈이 진짜 아끼던 거였거든. 아직 남아있으면 내가 뿌려주게.” 괜찮다는 나의 손을 끌더니 흰 통을 열고 내 머리에서부터 몸까지 그냥 쏟아붓는 게 아닌가. “할아버지 조금만 뿌리면 되지 이렇게 남은 거 다 부으시면 어떡해요. 할아버지 쓰실 것도 안 남았잖아요. 그리고 아무 냄새도 안 나는데 오래돼서 향이 다 날아갔나 봐요.” “괜찮아. 나는 이제 쓸모없어. 나도 조만간 먼데로 갈 거야. 학생 이제 정리도 거의 다했으니 어서 집으로 가봐. 오늘 고마웠어. 그리고 앞으로도 이렇게 착하게 남 도우며 살면 성공도 하게 될 거고 행복해질 거야. 지금 이 마음, 순수 그대로 간직해. 알겠지?”
그 후로 할아버지 집 앞을 지날 때 할아버지의 근황이 궁금했지만 그분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빈 리어카만 덩그러니 보일 뿐이었다.
중학교 시절 어느 순간인지는 몰라도 내 몸에서 좋은 향기가 난다며 사람들이 내 주위를 맴돌곤 했었다. 그 향이 왜 나는지, 어떤 냄새가 나는지는 나는 잘 모르겠지만 여하튼 이 향기로 나는 조금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는 혜택을 보며 살았다는 생각이 든다.
소심한 성격의 나로서는 마음에 들어 하는 사람이나 먼저 말을 걸어야 하는 상황에서 항상 머뭇거리게 되고 무슨 일이든 쉽사리 나서지 못하였다. 그러다 어느 날부터 내 주위로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하고 먼저 말을 건네주기 시작하였다. 그 덕분에 사람들과의 대화방법과 내성적인 성격도 자연스레 조금은 변하기 시작하였다.
고등학생이 되어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게 되고 재밌는 시간을 보내던 중 인근 학교 여학생과의 미팅을 하게 됐다. 키도 작고 왜소한 나는 나가봐야 망신만 당한다며 싫다고 했지만 친구들의 성화에 억지로 나가게 되었다. 여학생들이 남학생을 선택하는데 역시나 나를 선택한 사람은 없었고 선택을 받지 못한 여학생과 자연스레 짝이 되었다. 그러다 다 같이 차를 마시고 식사를 하고 나서 이상한 일이 발생되었다. 나를 외면하고 안중에도 없었던 여학생들이 내 옆으로 몰려들며 파트너 다시 정하자며 여학생들끼리 싸움을 하는 것이었다.
친구들은 그 광경이 너무 신기하고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보였지만 자존심이 많이 상한 모양이었다. 그날의 미팅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 후로는 그 누구도 나를 미팅자리에 같이 가자고 한 친구는 없었다.
항상 그런 식이었다. 대학 다닐 때에도 비슷한 일이 자주 일어났고 남학생들에게 나는 질투의 대상이 되어버렸다. 친구들이 짝사랑하는 여학생들이 나에게 접근을 하는 경우가 많았고 그때마다 친구에게 해명 아닌 해명을 하게 되고 그러다 친구들은 하나둘씩 떠나버렸다. 정작 나는 제대로 된 여자친구 하나 없이 대학생활을 마쳐야 했다. 나의 소심한 성격이 탓이었지만 그 당시 왜 젊음을 만끽하지 못했을까 라는 후회는 늘 하고 있었다.
의외로 진이 씨와의 관계가 쉽게 풀려 나갔다. 마음이 통화고 서로를 배려하며 우리는 금세 연인이 되었다.
매일 퇴근 후 데이트를 하고 서로의 마음을 나누고 많은 이야기를 했다.
쓸데없는 이야기가 대부분이었지만 누군가와 특히, 내가 좋아하는 사람과 오랜 시간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날 행복하게 만들었다. 우리는 파란 가을하늘과 하늘에 떠있는 구름과 날아다니는 새들의 모습, 가로수 나무가 귀신을 닮았다는 둥, 귀신이 나무속에 갇혀 있다는 둥 별의별 상상 속의, 아님 어린아이들 생각처럼 아무 의미 없는 말들로 시간을 보내기 일쑤였다. 그러나 그 역시도 나는 행복감을 느꼈다.
사귀기 전 진이 씨의 모습과 현재의 모습은 많이 달랐다. 회사 내에서는 말도 별로 없고 내성적인 성격으로 알았는데 지금은 활달하고 항상 웃으며 사람들과의 유대관계가 좋았다. 당연히 진이 씨의 환심을 사려는 남자들은 끊이질 않았고 나는 그때마다 그 사람과 나를 비교를 하게 되며 그 사람보다 못 난 나 자신을 자책하고 진이 씨가 나를 떠나 더 조건이 좋은 사람한테 가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 속에 눈치를 계속 보게 되었다.
우리가 사귄 지 6개월쯤 되는 어느 날, 진이 씨는 사촌오빠라는 사람을 나에게 소개해 주었다. 어릴 적 큰아버지 집에서 잠시 살았었는데 그 당시 힘든 자기를 오빠가 정말 잘 챙겨줬었고 지금도 부모님 역할까지 해 주는 고마운 사람이라며 사귀는 사람 생기면 제일 먼저 소개해 주고 싶었다며 데리고 나왔단다.
나이는 나와 동갑인데 훤칠한 키에 잘생긴 얼굴, 직업은 대기업에 다니는 유능한 사람이었다.
그 후로 우리는 3명이서 자주 만나게 되었고 단둘이 데이트하는 시간보다 3명이서 함께 술을 마시고 저녁을 먹고 영화를 보는 시간이 더 많아졌다.
나는 그런 시간이 조금은 부담스러워 진이 씨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진희 씨가 오빠를 생각하고 의지하는 건 이해하는데 이제는 진희 씨도 혼자 자립하는 연습을 해야 되지 않을까요? 옆에서 제가 최대한 든든하게 지키도록 약속할게요.”
“민규 씨가 부담이 많이 되셨나 보네요. 알겠어요. 앞으로는 우리 만남에만 집중하도록 할게요. 진작에 말씀을 하시지 그랬어요.”
그 이후로 오빠는 우리 데이트에는 나오지는 않았지만 대신 데이트하는 횟수가 조금씩 줄어들었으나 별문제 없이 우리는 잘 지내고 있었다. 한번씩 내가 괜한 이야기를 했나 후회도 조금은 했지만 언젠가는 끊어야 될 상황이기 때문에 내가 조금 더 노력하면 될 것 같았다.
오늘은 크리스마스이브. 그녀에게 프러포즈를 할 생각이다. 꽃다발과 반지를 준비하고 호텔 레스토랑을 예약했다.
그녀가 나의 청혼을 받아 줘야 될 텐데, 거절하면 어떡해야 하나 떨리는 마음으로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데 저 멀리서 그녀가 걸어오는데 뒤에는 사촌오빠가 같이 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얼른 꽃다발을 의자 밑으로 숨기고 일어서서
“형님 오랜만입니다. 그동안 잘 지내셨죠? 그런데 오늘 어쩐 일로?”
“오늘 같은 날 데이트 하는데 내가 눈치도 없이 끼어서 미안해요. 진이가 민규 씨랑 약속을 했는데 갑자기 일이 생겨 못 갈 것 같다하길래 오랜 오래간만에 제가 대타로 같이 술 한잔 하려고 왔어요.”
“민규 씨, 죄송해요. 갑자기 집안에 일이 생겨서 급하게 좀 가봐야 해서요. 미리 연락드려야 되는데 저도 조금 전에 연락을 받아서 말씀을 못 드렸어요. 전화드리려고 했는데 오빠가 오늘 같은 날 바람맞으면 기분이 더 상한다며 대신 술 친구 해준다고 해서 데리고 왔어요. 저는 먼저 일어나야 될 것 같아요. 나중에 전화드릴게요.”
진이 씨는 자기 할 말만 하고 급하게 밖으로 나가고 사촌오빠는 내 눈치만 살피다 살며시 내 앞자리에 앉아 “민규 씨 이러지 말고 우리 밖에 나가서 술이나 한 잔 합시다. 제가 오늘 쏠 테니 마음껏 마셔 봅시다.”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멍하니 출구 쪽만 바라보다 알겠다며 밖으로 나왔다.
근사한 빠에 도착해도 이런 황당한 상황에 머릿속은 망치로 한 대 맞은 듯 멍 한 상태이다. 도대체 무슨 일이냐며 사촌오빠에게 물었고 나에게 자기가 대신 사과한다며 이야기를 했다.
진이 씨에게 연락 끊은 지 오래된 아버지가 계신데 혼자 지내시다가 갑자기 쓰러지셔서 자식이라곤 딸 한 명밖에 없다 보니 병원에서 진이 씨한테 연락이 와 수술을 급하게 해야 되는데 가족의 동의가 필요하다고 급하게 와달라고 해서 부득이 가게 됐다고 설명을 해주는 것이다.
“그럼 저한테 그런 일이 있다고 이야기라도 해주고 가면 될 것을 그냥 그렇게 가버리니 너무 섭섭한 마음이 크네요.”
“아마 아버지 이야기 자체를 민규 씨한테 하고 싶지 않아서 그랬을 것 같아요. 너무 섭섭해하시지 말고 이해 좀 해주세요.”
그날 사촌오빠와 나는 밤새워 술을 마시고 집에 어떻게 왔는지 기억이 없을 정도로 많이 취했다. 다음 날 아침 눈을 떠 휴대폰을 보니 진이 씨와 오랜 시간 통화는 했는데 기억은 도통 나지를 않는다. 술 마시고 무슨 실수라도 하지 않았나 싶어 걱정이 되어 진이 씨에게 전화를 했다.
“잠은 좀 잤어요? 식사는요? 진이 씨 몸 상하실까 봐 걱정이 많이 되네요. 아버지 수술은 잘 끝났어요?”
“네. 덕분에 수술 잘하고 회복 중이세요. 조금 있다 의사 선생님 오시면 앞으로 어떻게 될지 이야기는 들어야 해요. 저도 조금은 쉬었고요. 너무 걱정 안 하셔도 돼요. 그리고 어제 보내주신 돈 덕분에 빨리 수술하게 되었어요. 고마워요. 조만간 바로 갚을게요.”
“아, 네. 알겠습니다. 진이 씨도 식사 잘 챙겨 드시고 시간 날 때 눈도 좀 붙이세요. 연락드릴게요.”
이게 무슨 일이지? 내가 돈을 보냈었나? 나는 바로 통장거래 내역을 확인을 해보니 진이 씨 앞으로 3백만 원이 송금되어 있었다. 그리고 어제 마신 술값도 내가 계산을 한 모양인데 술값으로 2백만 원이 빠져나간 상황이었다. 나는 사촌오빠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제는 잘 들어갔셨죠? 제가 어제 술을 많이 먹어 실수나 하지 않았나 모르겠네요. 실수한 거 있으면 제가 사과드리겠습니다.”
“아니에요. 어제 민규 씨가 속상한 마음에 과음을 좀 하신 모양이던데 실수하신 건 없었고 제가 술값을 내야 되는데 민규 씨가 끝까지 계산을 한다고 우겨서 어쩔 수 없이 제가 얻어먹게 되었네요. 다음에는 제가 꼭 사도록 할게요. 혹 부담되시면 이야기하세요. 제가 술값은 보내 드릴게요.”
“아닙니다. 제가 계산했는데 괜찮습니다. 그런데 제가 진이 씨한테 병원비를 송금한 것 같은데 도통 기억이 나질 않아 물어보려고요.”
“아, 그거요? 진이가 어제 전화가 와서 지갑을 분실했다고 저한테 병원비 좀 보내달라길래 민규 씨가 자기가 있는데 왜 오빠한테 부탁을 하냐고 화를 내시며 서운하다며 굳이 본인이 송금한다고 보냈는데 기억 안 나세요?”
“아. 네. 이제 기억이 나는 것 같네요. 감사합니다. 다음에 또 뵙도록 하겠습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기억은 도통 나지 않는다. 이왕 이렇게 된 것 기분 좋은 마음으로 도와주자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얼마 후 진이 씨와 사촌오빠가 다시 만나자는 것이었다. 사촌오빠가 회사 다니면서 조그마한 사업을 시작하기로 했는데 대출을 위한 보증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나는 꺼림칙해서 보증서는 것은 예전부터 하지 않았다고 거절을 했지만 앞으로 가족으로 지낼 사이고 또 직장도 대기업이라 전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며 한사코 부탁을 하는 것이다. 진이 씨는 서운함을 내색하며 무슨 일이 생기면 자기가 책임진다며 계속 부탁을 하는 통에 그만 사인을 하고 말았다.
그 후로도 진이 씨는 아버지 재 수술비와 생활비등을 빌려달라 요구를 했고 사는 집을 내놓은 상태인데 집값 하락 충이라 아직 팔리지 않아 그렇다며 집 처분하는 대로 바로 빌린 돈은 갚는다며 돈을 빌려갔다.
빌려간 돈은 2천만 원이 넘어가고 있었다.
그러다 어느 날 출근을 하니 회사가 난리가 났다. 직원들은 진이 씨가 출근도 안 하고 연락이 안 된다며 나한테 어디 숨겼냐고 추궁하기 시작했고 나는 무슨 일이냐며 물으니 직원들은 진이 씨 아버지 병원비 등으로 돈을 빌려줬는데 갑자기 이렇게 잠적해 버려 어떡하냐며 사귀는 사이이니 당장 찾아서 데려오라는 식이었다.
진이 씨에게 전화를 하니 전화는 이미 해지했는지 연결이 되지 않았고 사촌오빠도 연락이 안 되는 것이었다. 이상한 마음에 사촌오빠 명함에 적힌 회사번호로 전화를 하니 없는 번호로 뜨고 주소로 찾아가 보니 그런 직원은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은행이라며 전화가 왔다. 사촌오빠 앞으로 대출을 내줬는데 연락도 안되고 상환도 전혀 안 되는 상황이라 연대보증인인 나의 월급과 집을 차압할 예정이라는 통보였다.
하늘이 무너져버린 느낌으로 진이 씨 아버지 입원한 병원을 찾았다. 예상대로 그런 환자는 입원조차 한 일이 없다는 것이다. TV에서나 보던 사기라는 것을 내가 당한 건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회사에서는 둘이서 짜고 사기 쳤다느니 내가 병신같이 여자한테 미쳐 있는 돈 다 갖다 바치고 회사 동료들 까지 팔아먹었다느니 별의별 소문이 다 돌았다.
결국 나는 사람들의 눈총을 견디다 못해 12년을 다닌 회사를 그만두게 되었다.
집도 경매에 넘어가고 퇴직금도 다 날려버린 상황이다. 여태 내가 살아온 세월이, 나 자신이 너무 한심하고 쳐 량해 매일 술을 마시며 하루하루를 버텨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 사시던 조그마한 집이 있어 거기에서 생활하다 그 집도 팔아 생활비로 다 써버렸다.
여전히 진이 씨와 사촌오빠는 연락이 안 되고 경찰에서도 수배 중이라는 말만 할 뿐 다른 대책은 없다고 한다.
이제 더 이상은 살아갈 희망도 계획도 없어진 나는 죽어버리려 바닷가 방파제에 서서 한참을 바다를 바라보다 뛰어내리려 올라섰지만 용기가 나지 않아 결국 포기하고 돌아오고 말았다.
수중에 돈은 없고 갈 곳도 연락할 곳도 없었다. 나는 이러다 굶어 죽거나 얼어 죽겠다 싶은 생각을 하는 찰나 문득 내 몸에서 나는 향기를 생각했다. 예전부터 내 향기를 여자들이 아주 좋아했고 그 향이 좋아 항상 내 곁을 맴돌고 했으니 이걸 이용해서 여자들을 유혹해야 되겠다는 마음을 가졌다.
회사 친구였던 남 과장을 찾아가 얼마간의 돈을 빌려 중고차 한 대를 샀다. 그리고 회사 다닐 때 입었던 양복을 입고 한 껏 멋을 낸 뒤 고급 레스토랑, 카페 등을 돌아다녔다.
역시나 내가 지날 때마다 여자들은 나에게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고 나는 그 여자들과 만남을 시작했다. 진이 씨에게 당했던 방법을 그대로 따라 했다. 일단 돈이 좀 있어 보이고 순진한 여자를 타깃으로 삼았다. 그 사람 주위를 계속 맴돌았고 맴돌 때마다 나는 향기로 그 사람의 관심을 끌었다. “향수 뭐 쓰세요? 너무 좋은 향이 나서 집에 아빠에게도 사드리고 싶어요.” 이런 식으로 먼저 말을 걸어오면 나는 몸에서 나는 향이며 아마도 내 마음이 따뜻해서 따뜻한 향기가 몸에 베인 것 같다며 농담 식으로 응대를 하면 여자들은 아무런 의심 없이 나에게 호감을 표시했다. 세상에 이렇게 쉽게 여자를 유혹할 수 있다니. 여태껏 여자 마음을 얻으려 혼자 주저하고 생각하며 마음 아파한 나 자신을 자책하게 되었다.
일단 이렇게 호감을 가진 여자들의 재산은 나의 재산이나 다름없었다. 부모님이 갑작스레 쓰러졌다며 돈을 빌리기도 하고 차 사고로 인한 합의금이 급하게 필요하다며 빌리고 사채업자에게 돈을 빌리고 여자들을 보증인으로 세우기도 했다.
처음에는 죄책감과 그 사람들에 대한 미안함이 커졌으나 점차 평정심을 유지하게 되었고 나도 똑같은 방법으로 당했기에 이렇게 라도 해서 내가 당했던 피해를 보상받아도 된다고 스스로를 이해시켰다.
점점 나는 방탕한 생활에 젖어들었고 그 누구보다도 흉악한 사기꾼이 되어 있었다.
나에게 사기를 당한 여자들은 울면서 찾아와 돈만 돌려달라 애원하였고 나는 급한 대로 다른 여자에게 빌린 돈 일부를 조금 갚을 뿐이었다. 이렇게 돌려 막기를 하는 이유는 혹시나 경찰에 신고하면 내가 골치 아파지기 때문이다.
그러다 경찰에서 연락이 왔다. 나는 겁이 잔뜩 났으나 다행히 신고로 인한 전화는 아니었고 진이 씨를 잡았다는 연락이었다. 나는 한달음에 경찰서로 뛰어가 진이 씨를 만났다.
얼마나 찾고 찾았던 사람인가. 얼굴은 예전 모습보다 더욱더 세련되게 변했고 성형수술을 했는지 자세히 보지 않고서는 잘 알아볼 수가 없을 정도였다.
“진이 씨,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내가 얼마나 잘해줬는데, 내 마음도 진심이었는데 그걸 이용해 나를 이렇게 처참한 지경까지 몰고 가게 했어요?”
“민규 씨, 원래 사람은 서로 속고 속이고 하는 거예요. 순진해서 인생경험 했다고 치고 앞으로는 당하지 말고 살아요. 돈은 벌써 다 쓰고 없어요. 고소를 하던지 뭐를 하던지 알아서 하세요. 감방 한 두 번 들어간 것도 아니고, 어차피 몇 년 푹 쉬었다 나오면 돼요.”
“그럼 사촌오빠는 어떻게 됐어요? 연락 안돼요?”
“그, 씨발놈은 도망가서 나하고도 연락 안돼요. 내 돈까지 깡그리 다 들고 튀었어요. 사실 사촌오빠는 아니고 그놈이랑 동거하고 지냈는데, 참 순진하게 아직도 그걸 다 믿고 있었던 거예요?”
“이 도둑년. 내가 오늘 너 죽여버린다.”
나는 앉아있는 진이 씨 빰을 한 대 후려치고 머리채를 잡고 내동댕이를 치려는 찰나 경찰들이 나를 말리는 것이었다. “이러시면 폭행죄로 구속될 수 있습니다.”
허탈한 마음으로 경찰서를 나왔다. 허허허 헛웃음만 나올 뿐이다.
여태 뭐 한다고 저런 도둑년을 좋아했단 말인가. 내가 더욱더 미워지고 한심해질 뿐이다.
그 후로 나는 더욱더 악마가 되어갔다. 여자들에게 사기 치는 금액은 더 늘어나고 여자수도 더 늘어나기 시작했다. 급기야 전국 경찰서에 내 수배전단까지 뜨게 되었다.
그동안 사기 친 돈을 모아뒀기에 전국을 여행 삼아 도망 다녔고 시골의 순한 여자들 까지도 유혹하고 돈을 뜯어내려고 시도를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의 몸에서 더 이상 향기는 나지 않았다. 오히려 날이 가면 갈수록 좋은 향기는 악취로 변해가기 시작했다.
더 이상 여자들은 나의 주변을 맴돌지 않았고 오히려 나를 피하기만 하는 것이다.
심지어 근사한 식당에 들어가서 작업을 해도 냄새나는 남자가 치근덕 거린다며 신고를 해 가게에서 쫓겨나기 일쑤였다.
가지고 있던 돈도 거의 떨어지고 나는 자수를 결심했다. 어차피 갈 곳도 기댈 곳도 없는데 그냥 감옥이나 들어가서 죗값 치르고 몇 년 살고 나오면 뭐라도 할 게 생기겠지 하는 마음이었다.
경찰서 인근에 서서 담배 한 개비를 물었다. 예전에 착하게 살던 때 바라본 하늘과 똑같이 파랗고 맑은 하늘이었다. 하늘은 똑같은데 나만 변해 있는 것이었다.
경찰서에 들어 서렸는데 저쪽 골목길에 낯익은 리어카가 보였다. 어떤 할머니가 고물과 폐지를 가득 싣고 힘겹게 끌고 가는 것이었다.
나는 무언가에 이끌리 듯 그쪽으로 향했고 말없이 뒤에서 리어카를 밀었다. 쉽게 끌리는 리어카에 놀란 할머니가 돌아보길래 나는 도와 드릴 테니 천천히 가라고 했다. 어차피 조금 있으면 감옥에 갈 처지인데 좋은 일 하고 들어가지 하는 마음이었다.
힘겹게 도착한 곳은 조그만 공터 같은 곳이었다.
할머니는 연신 고맙다며 인사를 하고 나는 괜찮다며 돌아 서렸는데 폐지속에 눈의 띄는 물병하나가 보였다. 어디선가 본 듯한 물병이었다.
“할머니, 이 물병은 뭐예요? 할머니 거예요?”
“아니. 나도 처음 보는 물병인데 이게 왜 여기 있지? 젊은이 갖고 싶으면 가져요.”
할머니와 헤어진 후 한 참을 물병을 바라보니 어릴 적 폐지 할아버지의 물병과 같다는 걸 알았다. 정말 신기한 일이다. 혹 이 물병 때문에 내 몸에서 향기가 나는 것이었나? 물병 속에는 아직도 물 같은 액체가 있었다. 이 물병을 나시 내 몸에 뿌려볼까? 예전처럼 내 몸에서 향기가 나면 나는 경찰서에 가지 않아도 될 것이고 다시 여자들 유혹해서 생긴 돈으로 살면 되지 않을까?
온갖 생각을 하던 차에 예전에 할아버지가 하신 말이 떠 올랐다.
“학생, 앞으로도 이렇게 착하게 남 도우며 살면 성공도 하게 될 거고 행복해질 거야. 지금 이 마음, 순수 그대로 간직해. 알겠지?”
나에게 다짐에 다짐을 하셨던 할아버지는 이 물병의 정체를 이 향기의 실체를 알고 계셨나 보다. 예전 마음 그대로 살았더라면 평생 좋은 향기를 몸에 간직한 채 사람들의 부러움을 사며 행복하게 살았을 텐데. 나는 지금 향기가 악취로 변해버려 이 물병을 몸에 뿌려도 예전처럼 좋은 향이 나오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 물병을 남 과장에게 맡겼다. 내가 죗값을 다 치르고 다시 나오는 날 찾으러 올 테니 그때까지만 꼭 좀 보관해 달라며 부탁했다.
5년 후 나는 기나 긴 감옥생활을 마치고 출소를 했다. 제일 먼저 남 과장에게 찾아가 물병을 받았다. 수감 중 생각한 것은 오직 한 가지. 물병을 어떡할 것인지였다. 그냥 폐기해 버리는 게 나을까 아님 나같이 못된 일에 사용하지 못하도록 죽을 때까지 내가 보관하고 있을까. 그러다 생각해 낸 것이 할아버지도 나를 믿었기에, 내가 가장 이 향기에 적합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신념으로 나에게 뿌린 것 일 것이다. 일종의 은총일 수 도 있다. 나도 똑같이 하기로 했다. 이 신성한 향기를 품을 수 있는 진정한 사람을 찾을 것이다. 그래야만 한다. 나는 파란 하늘을 벗 삼아 길을 떠났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