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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민종 Oct 18. 2023

추억

  파란 하늘 사이로 군데군데 솜뭉치 같은 흰 구름이 얹혀있는 것이 이제는 가을이 왔음을 느끼게 하는 오늘이다. 새로운 거래처와의 계약 미팅으로 업체 방문 차 가는 곳이 근 20년 만에 찾게 되는 나의 어린 시절을 보냈던 괴정이라는 동네이다. 한참을 달리다 학창 시절 우정, 추억, 사랑 등 어쩌면 지금의 나로 살게 끔 만들어준 소중한 추억의 장소인 괴정골목시장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업체와의 미팅시간이 조금 남아있어 근체에 차를 세워 커피 한잔을 들고 시장 안을 걸어본다. 그러다 지금은 폐가처럼 거미줄과 온갖 쓰레기 더미가 쌓여있는 분식코너 앞에 다다르니 피식 웃음이 나면서도 한편으론 가슴이 울컥해지는 것이 느껴진다.


  "할매 문 닫으면 못 묵는다. 빨리 뛰라." 나와 친구 2명은 학교가 마치면 가지고 있는 돈을 모아 시장통 안에 있는 튀김, 부침개, 순대와 술을 파는 할매집을 찾았다.

  “나는 오늘 돈이 700원뿐이다. 너 것들은 얼마나 있노?" 서로 눈치만 보던 친구들은 천 원짜리 한 장씩을 꺼내 보이며 이 정도면 막걸리 2병은 묵을 수 있겠다며 서로 만족한 듯 미소를 띤다.

  항상 돈이 부족하고 배가 허기진 고등학교 2학년 시절. 물론 안주는 김치 하나지만.. 저녁 9시 50분 이 돈으로 막걸리로 배를 채울 수 있는 곳은 시장통 안 할매집 뿐이다.

  여지없이 할매집으로 쫓아가 “할매 우리 왔어예. 배고프다 빨리 막걸리 2병이랑 김치, 오뎅국물만 주이소” 웃으며 소리치면 할매는 무뚝뚝한 표정으로 “문디들 맨날 안주도 안 시키고 김치하고만 묵나” 핀잔을 주신다. 

  “아따 나중에 돈 생기면 여기 있는 거 다 팔아주께” 하고 너스레를 떨어보지만 괜히 할매한테 미안해진다. 드디어 기다리던 막걸리가 나오고 한잔씩 따라 시원하게 원샷을 때리고 김치 한 조각씩을 입에 넣어본다. 

  앞에 진열되어 있는 튀김에 자꾸 눈길이 가지만 사 먹을 수도 없는 처지라... 이렇게 다들 튀김만 보고 있을 때 할매는 “설거지 좀 해야 거었네”하시며 갑자기 돌아서서 무언가를 닦고 계시면 친구들은 서로 간 눈치를 보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앞에 진열되어 있는 오징어 튀김 하나씩 잽싸게 입안에 털어놓고 10초 안에 삼킨다는 각오로 열심히 입안운동을 하고 있다. 그러다 할매가 돌아서면 갑자기 입을 멈춘다. 정적이 흐르고 다시 설거지통으로 할매몸이 돌아가면 다시 튀김 먹기를 반복하다 술이 떨어지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할매 잘 묵고 갑니다. 또 올께요" 하며 낄낄거리고 자리를 박찬다. 친구 셋 모두 무언가 큰일을 한 것처럼 뿌듯하고 기분이 좋다.

  가을비가 심하게 내려 며칠 할매한테 못 간 대신 돈이 조금씩 주머니에 차 있어 친구들과 오래간만에 오늘은 할매한테 가서 제값 주고 제대로 함 묵어보자며 다들 싱글벙글 거리며 시장통으로 향했다. 그러나 할매가게는 문이 닫혀있다.

  “어? 할매 어디갔노? 뭔 일 있나? 가게 앞에서 서성이는 우리를 보고 옆자리 채소 파는 할매가 다가와 ”이 도둑놈들 왔네. 그 할매 몸이 아파 며칠 못 나왔다”라고 하시면서 “너것들도 양심이 좀 있어라 맨날 와서 도둑같이 안주 훔치묵고 해도 그 할매 너 것들한테 말한마디 하시더나. 밤에 야식 사러 손님이 와서 튀김 떨이 해준다고 해도 막걸리 아이들 오면 먹이야 된다며 안 판다고 하시는 할매인데 너 것들 할매한테 고맙다는 말한마디 해본 적 있나?” 쌍지눈을 뜨시며 야단을 치신다.

  그 말을 듣고 우리들은 한 동안 멍하니 그 자리에 서있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하다가 친구 한 명이 “할매가 다 알고 있었나? 진짜가?” 라며 중얼거린다. 너무 부끄럽고 미안하고 고마워 눈시울이 금방 뜨거워진다. 갑자기 친구 하나가 “야? 이라지 말고 우리 오늘 막걸리 묵을라고 한 돈 총 얼마고? 그 돈으로 할매 과자하고 박카스나 하나 사다 드리자”라고 하자 다들 기다렸다는 듯 있는 돈을 다 꺼낸다. 이 돈으로 박카스, 떡 3천 원어치 사서 채소가게 할매한테 ”할매요 이거 막걸리 할매 좀 갖다 주이소. 나중에 몸 괜찮아지면 다시 와서 인사드리겠다"며 산 물건을 건네주니 빙긋이 웃으시며 ”알았다 그 할매 우리 옆집에 살아서 내가 갖다 주꾸 마. 할매가 좋아라 하시겠네 “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할매 괜찮아야 될 낀데. 많이 아프면 안 될 낀데" 라며 연신 중얼거리며 무거운 발걸음으로 다들 각자 집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얼마 후 다시 친구들이랑 시장통 막걸리 집을 찾았을 땐 임대라는 문구의 종이만 붙여져 있다. 옆에 채소가게 할매한테 할매 우째된기요? 막걸리 할매 인자 장사 안 하는교?라고 물어보니 그 할매 인자 못 나오신다 좋은 데로 가셨을 끼다 라며 너 것들이 준거 할매 갖다 드리니까 한사코 다시 들고 가서 그 아~들 주라고 하셨다며 박카스 통을 우리에게 다시 건네준다. 모두들 시장통 천장만 쳐다보며 씨벌건 눈으로 ”이 박카스는 할매 드이소“ 하고 나와 모두들 동네 뒷산에 올라가 자책을 하며 자기들 만의 소원으로 할매한테 절을 해본다.


  지금 그 할매가 하시던 가게앞에 서 있으니 그때의 철없던 우리들의 행동과 할매의 자상함, 그리고 잘못을 늬우치고 반성할 줄 아는 우리들. 요즘 사람들은 쉽게 이해하지 못할 수 도 있겠지만 나름 순수했던 이 동네에서의 추억은 영원히 간직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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