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어렸을 때 병치레를 참 많이도 했다. 초등학교 입학 전이라 기억이 흐릿하지만 밖에서 보다는 집에서 지냈던 기억이 많고 골골거리고 허약해서 부모님 걱정을 많이 시켰다.
홍역을 앓으면서 발진이 생겨 고열에 시달리고 그 고열이 뇌로 옮겨져 머리에 부스럼이 생기고 고름이 엉기고 엄마는 그 고름을 짜내면서 아파하는 나를 보며 안쓰러웠다고 한다. 지금도 왼쪽 눈 옆에 홍역 발진 흉터가 남아있다. 조금 나아지자 이질이 찾아와서 계속 설사를 해대며 요강을 떠나지 못한데다가 나중엔 혈변까지 나와 병약해진 나를 보며 동네 사람들이 힘들겠다고 포기하라고 말할 정도였다고 했다.
엄마는 무슨 소리냐며 펄쩍 뛰고는 더 정성껏 나를 간호 하시면서 조금씩 호전 되어 한시름 놓았다고 했다. 커서 그 얘기를 지겨울 만큼 들을 때 내 얘긴가 싶을 정도였고, 힘겨운 사투가 내 기억에 없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싶었다.
그때 아버지는 병약해진 나를 위해 숲에서 개구리를 잡아다가 끓인 맑은 국물로 밥을 말아 먹이고 뒷다리를 소금에 찍어서 먹이면 내가 냉큼냉큼 잘 받아 먹었다고 했다. 개구리가 몸에 좋다는 말을 듣긴 했어도 내가 먹었다니 기억에도 없는 일이다. 동네 사람들도 조금씩 건강해진 나를 보며 다들 신통하고 대견해 했고 내가 회복한 건 모두 부모님 덕분이라고 했다. 언니들과 아버지랑 개구리를 잡으러 다닌 기억은 난다. 재미로 잡으러 다닌 줄 알았다. 먹은 기억까진 안 나는데 그걸 먹고 기력을 회복했다니 들을수록 신기하다.
70년 대 초. 어렵던 시대에 어린 시절을 보냈으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 뒤로 회복했지만 초등학교에 입학한 뒤부턴 편도선이 말썽이었다. 후유증인지는 몰라도 늘 목이 부어 기침을 심하게 하고 감기를 달고 살았다. 지금처럼 병원이 많지 않아서 동네에 있는 의원에 가서 약 처방을 받아 그 쓴 가루약을 달고 살다시피 했다. 알약을 삼키지 못해 엄마가 가루약을 숟가락에 게워 주면 그 쓴 약을 억지로 먹고 물을 마셨다. 나중엔 그게 싫어 알약을 삼키려고 기를 썼다. 약을 먹는 건 어린 나에겐 늘 곤욕스러운 일이었다.
밤마다 기침으로 깊은 잠을 못 자던 나를 데리고 초등학교 3학년 때 세브란스 병원에서 편도선 수술을 시켜주신 일은 지금도 잘 한 일이라며 거듭 강조하셨다. 철도 공무원으로 재직하던 아버지 덕분에 월급을 조금씩 모아서 당시엔 비쌌던 수술비를 마련하시고, 마음먹고 수술을 시켜주신 엄마께 감사하다.
자식이 아프면 부모는 애간장이 다 녹는다. 나도 그걸 경험해 봐서 안다. 결혼하고 큰아들이 태어났을 때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기뻤다. 사랑스런 생명체에 온 마음과 사랑을 다 쏟았다. 21개월 때 두 돌도 안 된 아들이 배가 아프기 시작하면서 병원을 아무리 다녀도 낫질 않고 급기야 나중엔 우유도 먹지 못하고 토하면서 시름시름 앓았을 때 난 그 고통을 경험했다.
세브란스 응급실도 가 봤지만 병명을 못 찾았다. 소아아동병원에 다니면서도 낫지 않자 떼를 써서 입원시킨 뒤 맹장임을 알게 되었다. 이미 맹장이 터져 복막염으로 진행되어 배가 불러온 어린 아들의 응급 수술이 진행되고 중환자실에 옮겨졌을 때 난 거의 반 죽다시피 했다. 수술할 때 흘린 눈물. 절박한 마음으로 애간장 녹으며 기다린 시간. 수술 후에 중환자실에 누워 엄마를 찾는 아들을 바라보는 심정. 일반 병실로 옮긴 뒤에도 열이 떨어지지 않아 울며 기도한 시간. 퇴원했을 때 그 기쁨과 감격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부모라면 아픈 자식 앞에서 무너진다. 대신 아플 수만 있다면 마음은 간절하지만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그 때의 끔찍한 기억을 떠올리면 내가 아팠을 때 엄마 마음도 짐작된다. 엄마는 치매를 앓으면서도 옛 일은 생생히 기억하셔서 내가 아팠을 때 얘기를 여전히 자주 하신다. 홍역에 이질에 편도선 수술에 나를 정성껏 돌봐준 엄마 덕분에 건강해졌고 아들이 아팠을 때 흘린 눈물과 그 절박한 심정을 알기에 엄마께 더 감사한다. 그 사랑을 기억하며 이제 내가 받은 사랑을 돌려드려야 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