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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리 Sep 02. 2024

<토지> 온기를 잃은 石女

토지가 품은 문장 2


<토지>는 "등장인물들이 워낙 많아 관계도를 그리며 봐야 할 지경"이라는 말에 

읽기도 전에 움찔~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런데  막상 책을 읽으며 보니 마을 주민 한 명 한 명까지도 저마다 애절한 사연이 묻어나 기억하려 애쓰지 않아도 자연스레 인물들의 관계도가 입체적으로 드러나네요.  

<토지>를 함께 읽는 멤버들 또한 모두가 주인공 같다는 말에 공감합니다.  


오늘 기록하고픈 문장은 '구천'이라는 인물에 관한 아름다운 문장입니다.

구천은 고귀한 풍모와 인품을 지녔지만, 태어난 순간부터 그 존재 자체가 숨겨지고 부정당할 수밖에 없는 사연을 가 기구한 인물로 등장합니다. 





토지가 품은 문장 2


<토지> 1부 1권, p.31-32 (마로니에북스)

얼마 되지 않아 달은 솟을 것이다. 낙엽이 날아 내린 별당 연못에, 박이 드러누운 부드러운 초가지붕에, 하연 가르마 같은 소나무 사이 오솔길에 달이 비칠 것이다. 지상의 삼라만상은 그 청청한 천상의 여인을 환상하고 추적하고 포옹하려 하나 온기를 잃은 석녀(石女), 달은 영원한 외로움이요, 어둠의 강을 건너는 검은 명부(冥府)의 손길이다.
구천이는 눈을 반쯤 감고 마을을 내려다보고 있다.

(.....)

달은 산마루에서 떨어져 나왔다. 아직은 붉지만 머지않아 창백해질 것이다. 희번덕이는 섬진강 저쪽은 전라도 땅, 이켠은 경상도 따, 너그럽게 그어진 능선은 확실한 윤곽을 드러낸다.
난간에 걸터앉아 달 뜨는 광경을 지켜보는 구천이의 눈이 번득하고 빛을 낸다. 달빛이었는지 눈물이었는지 아니면 참담한 소망이었는지도 모른다.


"달빛이었는지, 눈물이었는지, 참담한 소망이었는지 모른다...."





"해가 좋아? 달이 좋아?" 물으신다면, 

저는 1초도 망설임 없이 '달'입니다.


"왜 좋은데?"라고 이어 물으신다면, 

......

망설여지네요.


차가운 달빛인데 이상하게 따스한 위로가 느껴지는...

이 느낌을 어떻게 제대로 표현해야 할지 지금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박경리 작가의 필력을 통해 그려진 달의 차가움이 참 귀하게 느껴지나 봅니다.

청청한 천상의 여인이자,  "온기를 잃은 석녀(石女)"

"영원한 외로움", "어둠의 강을 건너는 검은 명부의 길손"...


등장인물의 서럽고, 서늘한 마음을 통해 바라보고 있기 때문일까요?

차가운 달빛은 창백함만 더해갑니다.

달을 바라보는 구천이의 빛나는 눈빛은 "달빛일 수도,  눈물일 수도,  참담한 소망"일 수도 있다 하였습니다.







달을 보며 소원을 빌어보신 적이 있나요?

저는 문장을 읽으며 생각했습니다. 

'참담한 소망일지라도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걸까?'

'소망이 왜 참담해야 할까?'


소망은,  비록 이루어질 수 없음을 예감한다 해도 희망을 품고 있어야 소망이라 할 수 있는 것 아닐까요?

그런데 구천의 소망은 참담하다 했습니다. 

이루어질 수는 있겠으나, 그것이 누구의 지지와 공감도 얻지 못하는 소망이기에 그러헀을 것입니다.

소망을 바라는 뜨거운 가슴과 포기를 말하는 차가운 이성 사이에서 구천은 지옥을 오가고 있을 것만 같습니다.


만약 저라면, 이 장면에서 그런 구천을 달빛이라도 따스하게 위로해 주는 것으로 묘사해 주었을 것만 같습니다.

그런데 박경리 작가는 오히려 서늘하고 차가운, 온기를 잃은 석녀(石女)로서 한없이 냉정한 달을 묘사합니다. 덕분에 읽는 독자는 구천소망을 더욱 참담하게 느낄 수가 있습니다.



난간에 걸터앉아 달 뜨는 광경을 지켜보는 구천이의 눈이 번득하고 빛을 낸다. 
달빛이었는지 눈물이었는지 아니면 참담한 소망이었는지도 모른다.

저도 언젠가 가슴은 뜨겁게 원하지만, 이루어질 수 없는 소망 하나를 품고 참담한 마음으로 달을 올려다보는 그런 날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달빛과 같은 눈물을 흘릴지도 모르겠습니다.


가슴에 진한 서러움을 고스란히 남기는, 그러나 아름답기만 문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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