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라만상에 스미는,
소설에서 뿐만 아니라, 우리 삶에서도 선함과 악함은 늘 존재합니다.
모르면 어쩔 수 없다지만, 악한 것이 무엇인지, 왜 악한지를 알고 있음에도 왜 계속해서 악함을 양산하고 그 고리를 끊지 못하는 걸까? 저는 늘 궁금합니다.
역사는 말할 것도 없고, 영화나 드라마, 소설, 뉴스, 개인의 일상에 까지도... 선함과 악함의 대결은 어디서나 스며있는것 같습니다.
그래서일까요?
<토지>에서 이런 맥락의 문장들이 등장했을 때, 저는 마치 기다리던 반가운 이를 만난 듯, 와락 두 손을 맞잡고 싶었습니다.
토지가 만난 문장
<토지> 7권, p.401-402, 마로니에북스
도둑질이란 한번 배우면 안 하고는 못 배기는 거구...
허어. 그러나 저 씨꺼먼 마음보 때문에 제 망하는 걸 모르고 있으니 세상에 이치같이 절묘한 게 어디 있을라구.
밤하늘의 그 수많은 별들 운행같이 삼라만상이 이치에서 벗어나는 거란 없는 게야.
돌아갈 자리에 돌아가고 돌아올 자리에 돌아오고,
우리가 다만 못 믿는 것은 이르고 더디 오는 그 차이 때문이고 마음이 바쁜 때문이지.
뉘우침 말고는 악이란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게야.
(....)
흑심은 흑심에 의해 타도되는 이치를 어찌 절묘하지 않다 할쏜가.
밤 하늘의 별들이 제멋대로 운행하는 것이 아니듯이, 우리 삶도 결국은 돌아갈 자리에 돌아가고, 돌아올 자리에 돌아온다고 하는군요.
악함이 끝내 선함의 자리로 들어올 수 없는 까닭, 악함이 결코 선함을 이길 수 없는 이유를 "흑심은 흑심에 의해 타도되는 이치"에서 헤아려 봅니다.
영화나 드라마를 보더라도 악한 세력은 종국엔 늘 자기네들까리 싸우는 꼴을 보입니다.
공동의 이익을 위해 야합했다 할지라도, 의심과 탐욕이 늘 함께 존재하기 때문이겠지죠.
자신보다 더 악한 존재, 더 지독한 흑심에 의해 제거되고, 또 그 보다 더 큰 흑심이 나타나면 또 전의 흑심은 사라지고... 이것이 반복되면서 어쩌면 악함의 세계에서는 영원히 존재하는 절대악이 존재할 수 없는지 모르겠습니다.
더 큰 선함이 나타났다 해도 이전의 선함과 싸워 이기려는 것이 아니라, 두 개의 물방울이 합해지면 더 큰 물방울이 되는 것처럼 더 큰 선함으로 성장합니다.
선함끼리는 충돌함이 없습니다. 아무리 작다 해도 무시되는 경우는 없습니다.
선함은 자석처럼 모든 선함을 끌어 모으는 힘이 있습니다.
한 사람의 선한 행동, 희생이 사회나 국가 전체의 선한 힘을 모으기도 합니다.
일제 강점기에도 끊어질듯 끊어지지 않았던 독립운동이 그러했고,
IMF 시기, 국민 한 사람이 내어 놓는 작은 금덩이가 마침내 나라를 살리는 거대 힘이 되었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왜 나쁜 사람들이 천벌을 받지 않을까?
사기꾼들은 왜 망하지 않고, 더 부자가 될까?
거짓말을 밥 먹듯 해도 잘 사는 이유가 뭘까?
악함이 '잘 사는 꼴'은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합니다.
정직하게 살아봤자 손해다, 누가 알아준다고 이런 법까지 다 지키며 사냐?
선한 마음은 늘 시험대 위에 놓여 있고, 그래서 종종 현실과 갈등을 겪습니다.
하지만 <토지>의 문장은 속 시원히 말해 줍니다.
흑심은 흑심에 의해 타도되는 것이 삼라만상의 이치다.
우리가 못 믿는 것은 더디오는 차이 때문이고,
마음이 바쁜 때문이지.
뉘우침 말고는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게야.
권선징악이란 이제는 옛 이야기에서나 나올법한, 먼지투성이의 신념처럼 생각되지는 않았나요?
밤 하늘의 수많은 별들의 운행같이 삼라만상의 이치, "돌아갈 자리에 돌아가고, 돌아올 자리에 돌아온다"는 이치를 이제는 진심으로 믿어보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