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쳤던 나의 어린 시절에 대하여
우울증 치료를 하다 보면 '내 우울의 시작은 어디일까?' 생각을 하게 된다. 나의 경우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인 것 같다. 돌이켜보면 우울하지 않을 때가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랄까. 시작이 언제인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우울하지 않은 상태가 '평안'이나 '안정'이라 한다면, 난 그 상태에 있었던 기억이 없다. 항상 망망대해에 혼자 떠다니는 듯한 기분으로 살았다. 조금 균형을 잃으면 바다에 빠져버릴 것을 걱정하며. 물론 어린 시절로 돌아가 볼 수 없어 확실히 알 수는 없다. 다만 몇 가지 기억들로 '내 우울의 시작이 아주 어린 시절이구나' 하고 미루어 짐작할 뿐이다.
어린 시절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 좋은 것이던 나쁜 것이던 기억자체가 별로 없다. 그래서 상담 초창기에 "어렸을 때는 어땠어요?" 하면 떠오르는 게 없었다.
내가 대충 하는 말을 듣고 선생님이 구체적으로 질문을 주시면 그제야 몇 가지의 기억이 떠올랐다. 내가 오랫동안 떠다니던 물속에는 많은 기억들이 묻혀있다. 빠질까 두려워서 차마 그 속을 들여다보지 못했다. 많은 것들이 그 물속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뿐이었다. 그래도 상담을 받으며 떠오른 몇 가지 기억들이 있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의 일이다. 우리 집은 맞벌이 가정이었다. 하교를 하면 거의 대부분의 날들은 아무도 없는 집에 들어가야 했다. 고요한 적막을 깨는 것도, 어두운 집안 곳곳에 불을 밝히는 것도 내 몫이었다. 가끔 밥을 사 먹으라며 엄마가 쪽지와 함께 돈을 두고 가셨다. 그 돈으로 뭘 먹었는지는 기억에 나지 않는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집안의 청결문제로 종종 다투었다. 그 다툼을 막기 위해 부모님 퇴근 전에 주방과 집을 청소를 하기도 했다. 부모님이 퇴근하면 별문제 없이 밥을 맛있게 먹고 싶어서. 여느 아이들이 그렇듯 부모님을 좋아했다. 부모님이 모임에 나가면 여러 번 전화했다. 받지 않으면 조금 화도 났던 것 같다. 그래서 울고 떼썼던 기억이 얼핏 있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될 때까지 그랬다. 엄마의 언니인 이모는 그런 나를 '태태 쟁이'라고 불렀다. (떼쟁이라는 뜻이다.) 부모님이 외출하고 전화를 받지 않을 때면 나를 버린 것 같은 기분에 휩싸여 엉엉 울었다. 그때 우리 집 거실에서 바다가 보였는데, 밤이 되면 까만 바다와 어두운 색의 가구가 쓸쓸하게 느껴졌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쓸쓸하다는 기분을 너무 빨리 알아버린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또한 나는 공포에 취약한 아이였다. 귀신의 집에 가면 엄마의 품 안에서 나오지 못했다. 아무것도 보지 않았으면서 귀신의 집에 다녀온 날은 밤에 잠에 들기 어려웠다. 꿈에 귀신이 나왔다.
가장 강렬한 기억은 환영을 본 것이다. 나는 어린 시절 과학 만화를 즐겨 읽었다. 그 과학만화책의 부록으로 인체 골격계 모형이 있었다. 신나게 조립해 벽에 걸어뒀는데, 막상 걸어두니 그게 너무 무섭게 느껴졌다. 밤이 되면 그 모형이 나에게로 걸어오는 환영이 보였다. 눈을 감으면 없어지겠지 싶어 눈을 감아도, 인체 골격계 모형이 나를 향해 걸어오는 장면이 반복되었다. 어린 나이에도 초 현실적이라 느껴 진짜인지 아닌지 수십 번 생각해 봤다. 그런 생각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혼자 깨어서 울었다. 그렇지만 부모님을 깨우지 못했다. 인체 골격계를 혼자 조립할 수 있는 나이가 돼서는, 이미 누군가의 달램을 받는 것이 어색해졌기 때문이다. 그게 부모라 할지라도. 어쩌면 부모님이 잠에 깨 짜증을 내는 것이 무서웠던 것 같기도 하다. 잊고 있었는데, 상담을 하다 보니 이런 기억들이 하나둘 떠올랐다.
눈이 간지러운 날이 있었다. 눈을 마구 비비다 보니 눈이 빨개졌다. 그런 눈을 보며 '내일 눈을 뜨면 눈이 안 보이면 어쩌지? 실명하게 되는 것 은 아닐까?'와 같은 걱정을 했다. 비슷한 생각으로 죽거나 아픈 것에 대해 지나치게 걱정했다.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잠이 안 왔다. 정확한 시기는 기억나지 않지만 초등학교 고학년에서 중학생이 될 때까지 불면증이 있었던 것 같다.
걱정들은 청소년기를 지나면서 다양해지고 깊어졌다. 은은하게 우울한 상태가 지속되었다. 중학생이 되어서는 잠이 안 오면 극복하는 나만의 방법을 찾았다. 바로 걱정이 들면 종이에 써두고, 내일 생각하는 것이다. 자려고 하는데 어떤 생각이 들면 종이에 그 생각을 썼다. 그 종이에 쓰면 생각을 더 이상 하지 않기로 다짐했다. 14살부터는 일기를 썼다. 그래서 항상 내 일기장엔 걱정이 가득했다. 중학생땐 한창 친구 문제가 고민이었다. 나는 무리로 어울려 놀지 못했다. 대신 친구 한 두 명과 깊은 관계를 맺는 것에 집중했다. 대학생 때는 평범하게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내가 이상하게 느껴졌다. 아직까지도 무리에 섞여 들지 못한다.
수험생활이나 취업준비 같은 시기에는 외로움이 큰 적이 되었다. 나의 편이 없다는 생각은 나를 쉽게 무너뜨렸다. 다음 기회가 없는 것처럼 나를 몰아세웠다. 벼랑 끝에 나를 세워두고 스스로 질책했다. 그런 행동들로 쉽게 우울에 빠졌다. 누군가에게 나의 힘든 일을 잘 말하지도 않았다. 내가 힘든 줄도 몰랐고, 말로 표현하는 것은 더욱 어려웠기 때문이다. 부모님께는 말해본 적이 한 번도 없다. 힘든 마음을 그저 두고 모르는 척했다. 나의 어린 시절은 그랬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차곡차곡 잘 눌러 쌓아 온 혼자만의 감정들이 있다. 그 마음의 바구니가 언젠가 감당이 안될 만큼 무거워질 줄도 모르고, 흘려보내지 못해 끝없이 눌러 담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