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석 게임 16_구신
구신(9개의 감정)이 귀신처럼 다가오고 있다
나를 향해 걸어온다
[좌절]은 고개를 푹 숙이고 땅만 쳐다보며 온다.
[헛된 욕심]은 눈이 없다.
[자책]은 입을 꽉 문 채 금방이라도 울 것만 같은 모습이다. 자기 머리를 쥐어뜯으며 오는데, 머리카락이 '후드득' 떨어진다.
[죄책감]은 무리에 중간에 있는데, 몸집이 작아 잘 안 보인다. 두 손에 무언가를 올려놓고 강하게 쥐락펴락하는 것 같다. 그리고 왼쪽 가슴이 뻥 뚫려있다.
[후회]는 어깨가 축 처져있는데, 손이 바닥까지 닿아 있다. 마치 긴 팔 좀비 같다.
[열등감]은 타인과 손을 절대 잡지 않으려는지 손이 없다.
[두려움]은 발목에 큰 족쇄를 차고 쇠사슬을 바닥에 끌면서 오고 있다.
[체념]은 두 무릎을 꿇은 채 바닥을 쓸면서 온다.
[트라우마(상처)]는 머리가 없다. 두 손에 무언가를 들고 있는 듯한데, 자세히 보니 뇌 같다. 거기에 영상이 재생되는데, 36배속 빨리 감기인 듯 정신없이 지나가고 있다.
마음이 뒤죽박죽 혼란스럽다
이럴 때면 나는 36계 줄행랑치고 싶은 마음에 사로잡히곤 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러고 싶지 않다.
‘이제 절대 도망가지 않는다.’
마음을 다잡고, 구신을 더 뚫어지게 바라봤다.
더 가까이 오니, 의상마술처럼 옷이 몇 초마다 바뀌고 있는 것이 보였다.
지난날 특정 시점에 9개의 감정이 나에게 씌었을 때,
해당 감정의 냄새가 묻어 있는 내 옷들이다.
몇 초 후, 다음 옷으로 바뀌고 이전 옷은 사라졌다.
그 이전 옷이 이미 도망, 불안을 입고 있는 내 마음에 덧입혀지는 걸까?
내게 덧입혀진 감정의 냄새가 그리 향기롭지 않다.
코를 막아봐야 이미 깊게 배인 냄새는 또 날 막아서려 한다.
그 틈에 구신은 어느새 꽤 가까운 거리까지 왔다. 금방이라도 잡힐 것만 같다.
+
-
정신을 차리고 보니, 생각보다 걸음이 빠르지 않았다.
다행히 당장 잡힐 것 같지는 않지만,
속도가 느리더라도 나에게 계속 오고 있다.
이대로 있으면 언젠가는 잡힌다.
난 구신에게 안 잡힐 거리를 유지했다
크게 앞서지도, 잡히지도 않게 뒤로 걸으며 이 장면을 피하지 않았다.
저 감정에 사로잡힌 나의 실제 모습은 어땠을까?
지난날을 떠올리며 구신을 조금 더 자세히 바라보았다.
자책은 입술이 터져 피가 나고 있고, 머리숱이 아까보다 현저히 줄어들었다.
그 앞으로 치고 나오는 체념은 두 무릎이 다 헐어있고, 붉게 물들고 있다. 그 뒤로 보이는 선명한 핏자국이 지나온 길을 따라 그려져 있다.
좌절은 맨 뒤에 처져있다. 땅만 쳐다보며 걷더니 이제는 목이 고무줄처럼 늘어나, 얼굴이 땅에 처박히기 직전이다.
그 바로 앞에 후회가 팔을 길게 늘어뜨리고 있다.
그 옆에 상처가 들고 있는 뇌 속 영상이 멈추는가 싶더니,
또다시 빠르게 재생된다.
상처의 기억은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후회 역시 저 좀비처럼 항상 나에게 따라붙을 것이다.
후회하는 것이 참 많다.
특히, 헛된 욕심에 두 눈이 멀었었다. 여전히, 지금도 난 내 눈앞에 있지만 못 보는 것들이 많을 것이다.
저 무리의 중간에 껴있는 죄책감을 계속 바라보았다.
그새 자랐는지 몸집이 더 커진 것 같다.
처음에는 잘 안 보였는데, 두 손에 있는 것은 심장이었다.
죄책감은 바라볼수록 더 커지고,
시간이 지날수록 심장은 점점 더 조여올 것이다.
족쇄를 차고도 무리의 맨 앞에 걷고 있는 두려움을 봤다.
저 쇠사슬이 어디에서부터 연결되어 있는 걸까?
길이는 얼마나 될까?
'끼이익, 끼이익'
저 쇠사슬 끌리는 소리가 싫다. 귀를 막고 도망가고 싶은 마음의 싹이 트는 게 느껴진다.
피하고 싶은 감정들을 계속 마주 봤다
이번 3(삶)의 문에 들어와 7라운드까지 거치면서 계속 그랬던 것 같다.
출구를 나가지 못한 채,
난 줄곧 다시 제자리로 가 다음 술래를 봤었다.
출구의 위치가 저 앞에 있는 것을 아는데도 열지 못했다.
하물며,
인생길 출구는 잘 보이지도 않고 어디 있는지도 모르면서
너무 쉽게 생각하고 산 거 아닌지 모른다.
이제야 찾으려 배우고 익히려 하지만,
여전히 모르는 건 마찬가지다.
그런데 분명한 건,
지금 내가 멈추면 난 다시 저 구신에게 잡힌다.
안내방송에서 들었던 것처럼
이번이 마지막 라운드라면,
난 더 이상 기회가 없고, 이 어둠에 영영 구속될지 모른다.
그 구속된 삶이 전보다 더 무섭고 두렵다.
그리고 저 앞에 놓칠 삶을 감당할 자신이 없기에
이 어둠이 계속 따라온다 해도, 희망이 오지 않는다 해도
난 나아간다.
물리치려 하는 게 아니었던 것 같다
또 난 물리칠 능력도 안되었다.
지금처럼 적당한 거리에서 함께 걷는 거였는지도 모른다.
구신은 앞으로도 내 남은 삶에 크고 작은 형태로 계속 올 것이다.
그때마다,
그저 함께 하는 것이라 여기자.
그리고 때로는 잡혀도 괜찮다고 여기자.
그래, 잡혀도 다시 걸으면 된다.
그리고 때로는 돌아서서 바라보자.
저게 진짜 내 모습이었다고 생각하니,
모두 끌어안아주고 싶다.
그러나 난 저 출구를 나가야 한다.
이 어둠은 이제 여기까지로 하자.
난 뒤돌아 정면을 바라보고 걸어갔다
그래, 난 걷는 것부터 했어야 했다.
그래, 난 달리기를 참 못했다.
도망, 회피한다고 했지만,
결국 소중한 이들 언저리에서 빙빙 돌았다.
그런 나를 바라보는 이들에게 걱정과 상처를 주었다.
.
.
다리가 아프지만 멈출 수가 없다.
.
.
땀이 나기 시작한다. 온몸에 열이 가득하다.
.
.
잠시 뒤를 돌아보았다.
여전히 구신이 따라오고 있다.
구신과 나 사이를 막던 얼음장벽이 땀과 열에 녹은 걸까?
아까와 달리, 다들 힘들고 지쳐 보인다.
잠시 서서 바라보았다.
그리고 좌절 뒤에 하나가 더 따라오는 게 보였다.
무리에서 한참 뒤처져 홀로 걷고 있는 열등감이었다.
순간, 구신의 옷이 모두 같게 통일되었다.
......
도박을 하던 시기에 즐겨 입던 옷이었다.
......
눈에 땀인지, 눈물인지 모를 뜨거움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결국
.
.
내가 도망치려 했던 구신은 다름 아닌 나 자신이었다.
그 순간, 더 이상 날 잡으려 오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나에게 도와달라고, 구해달라고 다가오는 것 같았다.
난 숨을 크게 내쉬며, 말했다.
'후~우'
"그동안 내가 너희들을 너무 싫어했어. 이제 미워하지 않으니까 편하게 와. 힘내. 가자!"
난 돌아서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동안 내 깊은 곳까지 돌아봐주지 않아서 몰랐다.
나의 여러 모습들이 늘 나와 함께 걷고 있었다는 것을...
저 감정들이 내 곁에 어디쯤 다가와 있는지를...
.
.
'지지지직, 쿵쿵, 뚜둑뚜둑뚜둑, 뚝뚝뚝, 치지지징'
처음 들었던 소리보다 더 강해진 아픔의 소리들.
내가 나를 계속 다치게 하고 있었다.
.
.
그로 인해, 주변에서 나를 걱정하게 만들며
그들의 소중한 시간과 에너지를 끝없이 소진시켰다.
그들이 나를 떠난 게 아니라, 내가 그들을 밀어내고 있었다.
.
.
드디어, 저 앞에 문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 순간, 바람이 불었다. 문틈에서 부는 건가?
아니다. 뒤에서 불어오고 있다.
'휘이잉~'
등 뒤 저 멀리에서부터 무언가 빠른 속도로 달려오는 것 같았다.
거의 다 왔다
한 걸음.
두 걸음..
조금만 더...
어서, 어서
드디어, 나에게 손대며 외쳤다.
"도중아, 자꾸 잡히지 좀 마라... 야! 술래 온다. 달려!"
"어, 자훈아. 하하하."
"그래, 감정은 물리쳐야 할 적이 아니라, 함께 걸어야 할 나 자신이었는지 모른다."
"그래, 이 어둠을 깨고 나가자. 이제 세 걸음 남았다."
[70화 함께_달리기 #한 걸음_어제]▶
[71화 함께_달리기 #두 걸음_오늘]▶▶
[72화 함께_달리기 #세 걸음_내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