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업사원에게 있어 고객은 신이다. 그것도 유일신이 아닌 다신교다. 질투하는 신이기도 하고, 무척이나 지루한 걸 싫어하는 신이기도 하고, 추종자의 약점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져 눈물 흘리게 하는 신이기도 하다.
문제는 우리가 처음 그 신을 만났을 때 어떤 유형의, 어떤 성격의 신인지를 모른다는 데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전에 신을 만난 경험으로, 또는 신을 만났던 다른 사람들의 조언으로 그 신을 대할 준비를 해야 한다. 이 글은, 아니 앞으로의 '고객을 만나다' 시리즈는 다양한 유형을 가진 신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그들에게 믿음을 보여줄 수 있는 신도로서의 자질을 갖추는데 필요한 기도문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기획하였다.
고객을 만나다 제1탄 - 본 그룹 CFO 이백일 그룹 전략재무실장
CFO는 최근 들어 어떤 Chief Officer들보다 중요한 자리를 매김하고 있다. 워낙 급변하는 금융환경과 치열한 경쟁에서 기업의 재무상황을 냉정하게 진단하고 미래를 준비해야 하는 역할의 중요성이 커졌기 때문이다. 서강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현재 6년째 본그룹 전체 재무실을 관장하는 이백일 실장님을 만나 그분(고객)이 생각하는 영업사원의 자질과 갖춰야 할 역량을 직접적으로 물어봤다.
궁금한 게 많은 신도(이하 영업사원) : 실장님 안녕하세요.
본인도 신도라고 생각하는 겸손한 신(이하 고객) :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영업사원 : 30년 가까이 경영재무파트에서 직장생활을 하셨으니 영업사원들도 많이 만나보셨을 것 같네요. 어떠셨어요?
고객 : 많이 만났죠. 개인적으로 뭘 사는 것부터 시작해서 유학 관련 업계에서 일할 땐 은행 쪽 영업사원도 많이 접했고 지금도 하는 일이 재무 쪽이니 구매나 비용관련하여 업체들을 많이 만나죠. 그런데 사람들이 많이 오해하는 것 중에 하나가 기업의 CFO는 무조건 갑일 거라고 생각하는데 아니에요. 우리 같은 사람들도 은행권이나 이런 곳에 자금관련된 좋은 조건을 받기 위한 영업을 해요. 영업사원이라고 할 수 있죠.
영업사원 : 아.. 그렇구나. 그럼 누구보다도 영업사원들의 심리나 심정을 잘 아실 수도 있겠네요. 그럼 아예 직진으로 여쭤볼게요. 제일 싫어하는 스타일의 영업사원은 누군가요?
고객 : 잘난 척은 아닌데 이런 말이 있어요. 지지위지지(知之爲知之) 부지위부지(不知爲不知) 시지야(是知也). 무슨 라임 맞춘 랩 같죠?ㅎㅎ 아는 걸 안다고 하고 모르는 건 모른다고 하는 것이 진짜로 아는 것이다라는 뜻인데 전 느끼는 게 많아요. 영업사원들 중에 은근히 잘 모르면서 아는 척을 하는 사람들이 꽤 있어요. 모르는 건 모른다고 인정을 해야 다음 스텝으로 넘어갈 공간이 생기는 데 고객을 무조건 가르치려고 하는 태도를 가진 영업사원은 사실 같이 미팅하기 싫죠.
영업사원 : 근데 또 영업사원이 무식하게 보이는 건 스스로 너무 망신스럽다고 생각하거든요.
고객 : 일리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무언가를 팔러 온 사람이라면 고객보다 많이 알아야죠. 저도 저를 지적으로 향상시켜 줄 수 있는 영업사원을 선호해요. 하지만 사람이 100% 다 알 수는 없는 거잖아요. 솔직하게 모르는 건 모른다고 하는 게 오히려 신뢰를 주는 거 같더라구요.
영업사원 : 신뢰라고 하셨는데 결국은 영업사원은 신뢰를 줘야 하는 거죠?
고객 : 이게 좀 식상한 말일수 있는데 영업사원은 고객의 마음을 움직여야죠. 고객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요소는 굉장히 많거든요. 결국 고객도 사람이라 100% 객관적일 수는 없는 거잖아요. 특히 전 사람은 철저하게 주관적이라고 생각해요. 물건은 매개체일 뿐이고 본인의 마음을 팔아야죠.
영업사원 : 좀 구체적으로 부탁드릴게요. 본인의 마음을 판다?
고객 : 가끔 보면 이 사람은 이걸 팔고 그냥 좀 대가를 얻으려고 하는 사람이구나라고 느껴지는 때가 있어요. 반면에 자기의 평생 고객으로 만들기 위한 플랜이 있구나라고 느껴지는 사람이 있고요. 후자인 경우에는 그냥 이 사람에게 맡기면 그 일은 내 입장에서도 해결이 될 거 같은 거야. 태도나 마음가짐이 느껴지는 거죠
영업사원 : 아하.. 그럼 연결해서 여쭤볼게요. 영업사원에게 있어 화려한 언변은 어떤 요소일까요?
고객 : 악어와 악어새 같은 거죠. 장점이자 단점이 될 수 있다는 게 함정인 거고. 언변은 두말할 필요 없이 큰 장점인데 그것이 역효과를 내는 경우도 많이 봤어요. 예를 들면 물 흐르듯 제품을 소개하는데 왠지 외워온 티가 너무 나는 거죠. 그리고 꼭 학생에게 가르치는 입담 좋은 선생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하고. 쉽지 않은 일입니다.
영업사원 : 진정성이 있어야 한다는 강조로 받아들여지네요. 그럼 진정성 말씀은 하셨고 두 번째 중요한 건 뭘까요?
고객 : 사전준비죠.
영업사원 : 사전준비라면?
고객 : 두 가지가 있다고 봐요. 첫 번째는 그야말로 정량적인 사전준비. 즉 영업을 가는 그 회사에 대한 정보와 구매담당자에 대한 정보를 미리 최대한 파악하는 것이죠. 고객에 대한 사전준비를 말합니다. 여담이지만 제가 아는 어떤 지인은 백화점에서도 네고를 합니다. 원래 백화점에서는 네고를 하면 안 되는 거라고 알고 있지만 그곳도 팀장할인이나 매니저 할인 같은 할인 재량범위가 있거든요. 그분은 그 메커니즘을 아니까 자신 있게 니들이 해줄 수 있는 만큼 해줘 봐라고 할 수 있는 거죠. 영업도 마찬가지라고 봐요. 그 회사가 쓸 수 있는 예산의 폭이라던지 현재 처해있는 상황 같은 걸 미리 알고 있다면 훨씬 딜이 편해진다고 할 수 있겠죠.
두 번째는 정성적인 사전준비인데 사실 이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쉽게 말하면 역지사지입니다. 방문 전에 혹은 전화 전에 내가 그 회사라면 그 고객이라면 내 말에 설득이 될 것인지를 미리 입장 바꿔 생각해 보는 겁니다. 그래서 가능하면 나라도 설득이 되겠다라는 준비가 됐을 때 실전에 돌입하는 거죠.
영업사원 : 아.. 생각해 보니 그런 역지사지를 하고 고객을 만난 적이 별로 없는 거 같아요. 너무 중요한 부분인데..
고객 : 그런 준비를 하고 온 분들은 티가 납니다. 내가 이러이러한 어려움 또는 문제가 있다고 얘길 하면 마치 나보다 더 고민을 했던 사람처럼 대응을 하니까요. 그런데 그 사람은 고민했을 뿐 아니라 해결책을 가지고 온 사람이잖아요. 신뢰가 갈 수밖에 없죠. 그때부터는 그냥 한회사 사람처럼 협의를 하게 돼요.
영업사원 : 혹시 영업사원이 마법을 부릴 수 있어서 실장님의 마음을 하나 알아낼 수 있다면 꼭 알아줬으면 싶은 마음 하나는 뭘까요?
고객 : 음... 그런데 그건 마음 하나처럼 개수로 표현될 수가 없을 것 같네요. 그거 하나를 알아줬기 때문에 모든 걸 선택할 수도 있겠지만 전 안 그럴 거 같아요.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지만 뭔가를 영업사원으로부터 구입을 할 때 전 종합적으로 판단하려고 애를 씁니다. 예를 들면 꼭 이 제품이 아니더라도 내가 원하는 걸, 혹은 원하는 수준을 전체적으로 알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드는 사람.
영업사원 : 말귀를 잘 알아듣는?
고객 : 그런 거죠. 근데 그게 그렇게 단순한 게 아니라 뭔가 종합예술을 지휘하는 영화감독이나 오케스트라 지휘자 같은 느낌을 주는 사람. 오늘 이건 안 살 수 있지만 다른 상황이 생겼을 때 물어보고 싶은 느낌이 드는 영업사원이 있어요. 섬세한 사람이죠. 아 이 사람은 오늘 저 제품을 단순히 팔러 온 게 아니라 자기가 파는 제품들에 대한 전체적인 플랜을 가지고 있구나라고 느껴지는 사람인 거죠.
영업사원 : 어려운 얘기네요.
고객 : 어려운 얘기지만 저도 그렇게 하려고 애를 씁니다. 저도 CFO다 보니 은행권이나 금융권에 자금조달등의 이유로 우리 회사를 영업하는 사람이잖아요. 그 사람들에게 영업할 때 단순히 지금 얼마가 필요하고 그런데 금리는 어땠으면 좋겠고 라는 말부터 하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 회사가 어떤 비전을 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그 스텝을 어떻게 밟고 있는지를 먼저 이해시키고 지금의 이 자금조달은 안 된다고 해서 치명적이진 않지만 잘 될 경우엔 목표달성을 위한 큰 도움이 될 수 있다라는 걸 강조해요. 자금투자를 하시는 분들도 그렇게 본인이 그 비전을 이해하고 설득시켜 주길 바라니까요.
영업사원 : 제가 설득이 되네요.ㅎㅎ 가벼운 질문 하나 드릴게요. 아마 영업사원과 미팅을 하시면서 제품은 맘에 드는데 영업사원은 맘에 들지 않거나, 반대로 영업사원은 맘에 드는 데 제품은 맘에 안 드는 경우가 있으셨을 텐데 어떻게 표현하시는지 궁금하네요. 짧게 부탁드릴게요.
고객 : ㅎㅎ 성격상 직설적으로 얘기하진 않는데 짧게 하라고 하시니. 음... 제품이 맘에 안 드는 경우는 정확하게 꼬집어서 말로 할거 같고 영업사원이 맘에 안들 경우엔 표정으로 표현할 거 같네요.ㅎ
영업사원 : 표정을 읽을 줄 알아야겠네요. 영업사원은?
고객 : 기본 아닙니까?ㅎㅎ
영업사원 : 오늘 영업사원 입장에서는 아주 당연하지만 잊고 있던 중요한 얘기를 많이 해주셨는데요. 요컨대, 진정성, 역지사지, 사전준비 같은 거요. 만약에 영업사원 품성 명예전당이 있어서 하나를 더 헌당해야 한다면 마지막으로 하나 부탁드릴까요?
고객 : 인내죠. 더 자세히 말하자면 본인의 마음을 다스릴 수 있는 제어력, 평정심이라고 봐요.
영업사원 : 제어력이라..
고객 : 우리가 동물의 왕국을 보면 항상 사자가 얼룩말을 사냥하는데 주로 성공하는 것만 보잖아요. 근데 알다시피 사자가 사냥을 성공하는 건 확률적으로 극히 낮거든요. 영업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10번 try 해서 1번 수주하면 대단한 거잖아요. 그럼 나머지 9번을 그냥 분만 삭히며 있을 거냐, 아니면 원인과 이유를 돌아보고 다음번에는 성공할 거야라고 실패한 영업에 가치를 부여할 거냐는 매우 중요하죠.
영업사원 : 역시 식상한 얘기일 수 있지만 또 잊고 있던 중요한 얘기네요. 마지막으로 영업사원들에게 조언하고 싶으신 게 있다면요?
고객 : 품위 있는 단어와 워딩, 문장을 구사하도록 연습하라고 하고 싶어요. 영업 자체가 천박한 게 아닌데 말투에서 태도에서 천박하게 만드는 영업사원을 보면 화가 납니다. 제일 많이 그런 걸 느끼는 게 결국 말투와 사용하는 어휘더라구요. 한마디를 하더라도 품격 있는 어휘를 구사하는 영업사원과 대화하고 싶어요.
영업사원 : 갑자기 오늘 제가 했던 말들을 돌아보게 되네요.ㅎㅎ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실장님.
고객 : 고생하셨습니다.
글로는 담을 수 없는 정도의 많은 대화를 나누고 헤어졌다. 인터뷰 내내 이백일 실장님이 강조한 것은 영원한 갑도 영원한 을도 없다는 거였다. 본인도 외관상으로는 고객일지 모르지만 영업사원의 심정으로 회사일을 하는 경우도 많고 무엇보다 일상생활에서 그런 마인드일 때가 많다고 하셨다.(이 세상에서 영원한 갑은 와이프뿐이라고도 하셨다ㅎㅎ)
인터뷰를 마친 내 솔직한 소감은 역시 모든 건 기본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진정성, 신뢰, 품위 있는 말투, 고객과 입장을 바꿔보는 역지사지, 사전준비. 이런 걸 생각 안 해본 영업사원이 있겠는가? 문제는 그걸 생각만 하는 게 아니라 실천하고, 그걸 뛰어넘어 습관으로 몸에 장착하고 있느냐에 대한 아픈 충고였다. 가장 기본이라고 생각하지만 가장 무시당하는 신도들의 나쁜 신앙심을 일깨워준 은총의 시간이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여기서 하나의 궁금증. 신은 과연 신 자체만의 품성으로 영업사원의 선호도가 달라질까? 아니면 신이 있는 장소도 중요한 요소가 될까? 올림푸스에 있는 것과 천당에 있는 것과 극락에 있는 신들은 그 있는 곳이 달라 영향을 받을까?
오늘 인터뷰는 제조업, 특히 유수의 식료업에 종사하는 고객을 만났지만 다음에 만날 다른 업종의 고객은 어떨지 궁금해진다. 다양한 업종을 두루 인터뷰하게 되면 개인의 특성 외에 업종의 특성으로 영업사원에게 바라는 게 다를지 확인할 수 있으리라 믿어본다. 인터뷰를 마치고 가볍게 마신 커피가 아메리카노였는데도 무척 달달했다. 이백일 실장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