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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아버지

아빠가 지켜줄게 너의 등굣길

by Wishbluee

2025년 11월 25일 오전 9시


"어휴, 다음 주 화요일은 아침 일찍 일어나야겠네."

한숨을 푹 쉬면서 말했다.

"왜?"

남편이 물었다.

"나 녹색이야."

그러자 남편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다시 한번 물었다.

"녹색이.. 녹색? 녹색이 뭐야?"

나는 기가 막힌 표정으로 되물었다.

"녹색이 뭔지 몰라?? 여보~ 당신 애가 둘인데?? 내가 여태껏 아침마다 섰는데, 당신은 그게 뭔지도 몰랐다고? 어우, 어지간하다 증말."


'그래, 그렇지 뭐.'


늘 다정하다고 믿어온 남편이었다. 그래서 이런 순간에는 실망감이 아마 두 배는 더 큰가 보다.

두 아이의 초등경력을 다 합쳐도 십 년이다. 녹색이 뭔지 어떻게 모를 수가 있지. 섭섭하고 서운했다.


그래서 나는 살짝 심술이 난 목소리로 말해버렸다.


"애들 등교지도 하는 거 있잖아. 그게 녹색이야. 그거 아침 일찍 일어나서 나가야 돼.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서야 해. 아니, 어떻게 그게 뭔지도 몰라. 이번엔 여보가 서보기라도 할 거야?"


..... 잠시간의 침묵이 이어졌다. 내 목소리가 너무 볼멨나. 뭐 그래도 할 수 없지. 난 무척 섭섭했다고.라고 생각하는 순간.


"그래. 내가 설게."


나는 잘못 들었나 싶어서, 다시 한번 물어봤다.


"진짜? 정말로?"

"어. 이번에는 내가 그 녹색 설게."

"와우!! 진짜지??? 나, 그럼 동네방네 자랑한다?"

"그래. 그렇게 해."


나는 정말로 신이 나서 그날부터 만나는 엄마들한테 모두 자랑을 했다. 그리고 자랑했다는 이야기를 또 남편에게 했다. 아이도 그 이야기를 듣더니 신이 나서 엉덩이를 실룩샐룩하며, 진짜야? 아빠 진짜 아빠가 설 거야? 하고 계속해서 물어봤다. 그날은 평소 등교하는 곳으로 말고, 아빠가 서 있는 곳으로 등교를 할 거라며 한참을 종알거렸다.


녹색 당일 날.

남편은 아침부터 안절부절못하고 우왕 좌왕 정신없이 거실을 오갔다. 일찍 일어나서 깨끗이 씻고 옷을 꺼내 입고 분주하게 움직이느라 그런가 보다. 봉사시간은 8시 반부터 9시까지. 둘째가 다니는 초등학교는 집에서 5분 거리다. 8시 20분에 나와도 학교 정문에 마련된 캐비닛에서 조끼와 깃발을 챙기고, 봉사 장소로 가기까지의 시간은 매우 충분하다. 하지만 그걸 알리 없는 남편은 8시 5분에 급하게 외쳤다.

"나, 나갈게!"

나는 급한 남편을 말렸다.
“20분에 나가면 돼. 너무 일찍 나가면 뻘쭘해.”

다른 봉사자들은 대부분 ‘반 엄마’들이다. 나조차도 어색할 때가 많은데, 가뜩이나 낯선 남편이 미리 가 있다가 마주치기라도 하면 얼마나 불편할까. 게다가 일찍 나가 서있다가는, 30분 봉사가 40분, 50분으로 늘어날 수도 있었다.


남편을 보내고, 아이도 등교하고, 나도 나갈 채비를 하고 있었는데 부재중 전화가 떠 있었다. 친한 동네 동생이다. 나는 전화를 걸었다.

"응, 무슨 일이야?"

"아 언니, 아버님 핫팩이랑 물 챙겨가시라고요. 그런데 아까 만나서 챙겨드렸어요."

"아아, 고마워~ 오늘 아주 여자들 사이에서 혼자 고생 많이 했겠다."

"언니! 오늘 죄다 아버님이셨어요."

"뭐??? 어머나 뭐 이런 신기한 날이 다 있어? 군계일학은 틀렸다. 어쩜~ 흐흐흐흐흐"


전화를 끊고 한참을 웃었다.

오늘은 그야말로 녹색아버지의 날이었던 것이다.



화실에 도착해서 그림을 그리고 있었는데 남편이 메시지를 보냈다.

그걸 보고 또 한참을 웃었다. 화실사람들이 무슨 일이냐고 물어볼 정도였다. 사진을 한 여섯 장 보냈는데, 오늘 봉사한 사진이었다. 아침에 내가 글 쓴다고 부탁했긴 했는데, 막상 받아보니 웃음이 터졌다. 비가 추적추적 오는데 한 손에는 우산을 들고 남은 한 손에는 봉사깃발을 들고 양손을 다 썼는데 어떻게 사진을 찍었을까. 마누라 부탁이라서 어떻게든 낑낑대며 셔터를 누르고 있었을 남편의 모습이 떠올랐다.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이렇게 귀엽수. 여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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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가는 길에 남편에게 전화를 했다.

"비도 오는데 안 추웠어? 수고했어. 오늘 당신 덕분에 우리 둘째 아주 어깨가 솟구쳐 올랐겠어! 아빠 만나서 너무 반가워하지 않았어?"

내 상상 속에서 아이는 아빠에게 달려가 한참을 껴안고 있었다.

"우리 둘째, 오늘 못 봤는데?"

"뭐어어어어???"

나는 길거리에서 또 으하하하하 배를 잡고 웃어버렸다. 아니 그렇게 아빠가 봉사 서는 걸 기다리더니, 이 녀석이 뒤통수를 쳤네. 아빠보단 친구들이었던 것인가. 진짜 너무 웃긴다. 아빠는 너 때문에 봉사했던 거였는데, 보람도 없이.

"아이고 허무했겠네. 아마 친구들 만나려고 그랬나 봐. 너무 섭섭해하지 마."


저녁에 동네 동생을 만났다.

"언니, 아버님 표정이 진짜 뿌듯해 보이시던데요."

"그으래??"


녹색이 뭔지도 헷갈려하던 남편.

생각해 보면 자세히 설명도 안 해주고 서운해했던 내 탓도 있었다.

집에 오면 늦은 밤이고, 아침엔 출근하기 바쁘고, 회사에 가면 온통 일일일...이니, 언제 그런 걸 챙겨 알아볼 시간이 있었을까. 이렇게 아이를 위해 기꺼이 나서주는 남편이었는데, 아무것도 몰랐던 것은 어쩌면 나였을지도 모르겠다.


집에 돌아온 남편은 둘째한테 왜 아빠를 보러 오지 않았느냐고 물어봤다.

나는 당연히 친구들 만나러 마음이 바빴던 것이 아니었을까 싶었는데, 그냥 너무 늦어서 지름길로 갔다는 대답이었다. 아빠를 너무너무 보러 가려고 노력했는데, 쉽지 않았다며 눈썹을 밑으로 늘어뜨리고 변명을 하는 꼬맹이가 또 웃긴다.


오늘 남편의 녹색아버지 봉사 덕분에 몇 번을 웃었는지 모르겠다.

이제야 피곤한 몸을 뉘인 남편에게 넌지시,

"여보, 녹색아버지 할 기회가 이제 두 번밖에 안 남았어."

라고 슬쩍 말해보는 오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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