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의 한마디에, 잠시 멍해졌다.
2025년 11월 26일 오후 6시
올해는 엄마 김치를 먹지 않는다.
명절 때 교통사고를 당하신 엄마를 생각하면 당연하다.
다행히 크게 다치진 않았지만, 그래도 갈비뼈에 실금은 가신 듯하다.
"엄마, 나 이번엔 김치 사 먹을게. 오해하지 마. 엄마 김치 너무 먹고 싶은데. 올해는 엄마가 좀 힘들까 봐 그래요."
혹시 맛이 없어서 그런가 하고 생각하실까 봐 얼른 이유까지 설명하고 전화를 끊었다.
김치냉장고를 뒤져 마지막 김치를 탈탈 털어서 맛본다.
아쉽기는 너무 아쉽다. 이 맛있는 김치를 올해는 못 먹는구나.
11살 둘째는 매운 걸 영 못 먹다가, 최근에 김치에 맛을 들였다.
외할머니의 김장체험이 즐거운 기억이었나 보다. 올해는 언제 김장하러 갈 거냐고 채근을 한다.
"엄마~ 올해는 왜 안 가~~"
"응~ 외할머니가 올해는 아프셔서, 이번엔 그냥 사 먹기로 했어."
"치. 김치 담그는 거 너무 재밌는데. 나 양념 버무리고 싶은데. 엄마. 그러면 엄마가 하면 안 돼?"
갑자기 뒷골이 뻐근해진다.
"뭐..?? 뭐? 엄마 허리 아파서 안돼!"
"김치 좀 담근다고 허리 고장 안나!"
예상치도 못한 둘째의 말에 깜짝 놀라 잠시 멍하게 있었다.
언젠가는 스스로 김장을 해야 한다는 각오는 하고 있었다.
하지만 대놓고 김치 좀 하라는 요구를 받으니 기가 막혔다.
머릿속에 배추를 사다가 절이고, 양념을 썰어 만드는 내 모습을 잠시 상상했다. 아. 올해인가. 올해는 정말 해야 하나. 고민이 되었다. 유튜브를 켜도 자꾸 알고리즘에 김장이 뜬다. 궁금해서 열어보다가도 왠지 독촉장을 받는 것 같아서 마음 한켠이 무겁다.
김장 철만 되면 우리 엄마도 이런 마음이었으려나.
김장은 노동이다. 그것도 아주 격한. 쭈그려 앉아서 자른 배추에 소금을 치고 절여서 뒤집어 놓고, 무를 비롯한 온갖 야채들을 채 썰어 놓고 양념을 만들어 버무린다. 엄마는 작년에 황태를 사다가 달여서 양념에 쓸 육수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 무거운 물에 절인 배추를 짜고, 다시 양념을 버무리고.. 어디 그것뿐이야. 겉배춧잎으로 국도 끓여야지, 수육도 삶아야지... 와. 진짜 그걸 어떻게 했대.
엄마한테 미루어둔 김치노동이 딸아이의 발칙한 발언으로 내 순서로 다가오고서야, 그 힘듦이 비로소 확실하게 느껴졌다. 엄마 힘든 줄도 모르고 옆에 와서 입만 쩍쩍 벌려대던 11살 내가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한 번도 힘들다 하시지 않아서 괜찮은 줄 알았다. 정말 자식들은 너무나도 이기적이다. 어쩜 그리 지 생각만 하는지. 미안함이 훅 밀려왔다.
엄마한테 다시 전화를 했다.
"엄마, 엄마도 김치 사 먹자! 나 사는 김에 엄마 것도 사드릴게요! 요새 김치 잘 나와!"
그런데 엄마는 뜻밖의 말을 하셨다.
"지난번에 절임배추 샀더니 영 맛이 없어서 이번엔 생배추로 할 거야."
"엄마아~ 엄마 몸도 안 좋은데 꼭 김장해야 해? 내가 사준다니까!"
"됐어. 내가 설마 그 정도도 못하겠니? 너네 아빠도 있고 괜찮아."
전화를 끊고 잠시,
'그럼 이번에는 내가 담가다가 줄까' 생각해 봤다.
배추상자를 받아 들고 한숨 쉬는 미래의 내가 잠시 스쳐 지나갔다. 나는 망설임 없이 김치구매 버튼을 눌렀다.
'엄마.. 미안해'
매년 양심 없이 김치를 받아먹던 내가 부끄러웠다.
미안한 마음에 용돈을 드리면 엄마는 가끔 화도 내셨다.
"내가 너한테 이거 받을 거면 안 하지!"
그래도 꼭꼭 주머니에 넣어두고 도망가듯이 집으로 왔다. 아, 그거라도 하길 잘했다. 하지만 그거로는 너무 턱없이 부족하다. 겨우 그걸로, 불편한 마음을 풀었었다니...
주문한 김치가 왔다.
나는 수육을 삶았다. 썰어서 김치와 같이 주니, 너무 맛있다며 손가락을 쪽쪽 빨아대며 먹는 아이를 보며, 한 포기라도 시도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엄마 마음이 이런 거였나.'
엄마 옆에서 입을 벌리고 아기새처럼 막 한 김치를 받아먹던 나를 보며, 아픈 허리를 애써 두들겨가며 기어이 배춧국을 끓이고 수육을 삶았을 우리 엄마 생각에 갑자기 또 코끝이 시큰하다.
그래도 아직 나는 자신이 없다.
매년 김치 다 담가놓고 먹으러만 오라고 하는 엄마가 되려면 아직 멀었다.
괜스레 이런저런 생각에 심난했다. 엄마 생각하면 왜 이렇게 마음이 복잡해지는 건지...
'에휴, 막걸리나 사다 놓을걸'
이라고 생각해 보는 오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