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1일차 -3. @광화문광장, 교보문고
"음… 또또 생각에는…"
우리 딸은 다섯 살 무렵부터 자기 스스로를 부를 때는
‘또또’라고 했다. 유치원 때 친구들이 그러나 보다,
저러다 말겠지 싶었는데, 초등 6학년 12살이 된
지금까지도 집에서는 스스로를 ‘또또는…’이라고
부른다. 밖에서는 절대 그렇게 부르면 안 된다고
펄쩍 뛰면서도…. 암튼.
"또또는 내 생각대로, 내 마음대로 만들어볼 거 같아.
아까 아빠 말한 대로 어릴 때, 젊을 때, 노인일 때
얼굴이 다 다르잖아, 완전 똑같지는 않잖아?
나도 내가 좋아하는, 내 어릴 때 사진이 있거든,
그리고 내가 좋으면 그 표정이 있대, 친구들이...
그러니까 내가 생각하는 세종대왕 해보고 싶어.
그래서 세종대왕이 한 일 중에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할 때, 세종대왕 나이로,
그 나이에 맞는 얼굴로…
아 그리고 세종대왕 얼굴 누가 알아?
세종대왕이라는 것만 알면 되지.
내가 갑자기 외국인으로 만들 건 아니잖아?"
딸은 작가의 상상력과 예술성에 손을 들어주었다.
나중에 더 크면, 세상에는 추상화 같은 인물 동상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유럽의 발자크 동상,
우리나라의 박연 동상 같이 고증보다 예술에 가까운...
우연히 동상에 대한 딸의 관심이 확 높아진 상태로
다음 예정지인 교보문고로 향했다. 오늘은 동상의 날인가,
새로운 동상 하나가 우리의 눈을 잡아끌었다.
"또또야, 또또야, 이거 봐봐,
옆에 서봐. 사진 찍게…."
"이것도 동상이야?"
"그러엄, 옆에 설명도 있잖아"
우리 눈높이에서 벤치에 앉은 채
자신의 옆자리를 내어주고 있는 작가 염상섭의 동상.
"또또야, 우리 여행이니까 기념사진 ㅋㅋ
옆에 앉아봐, 앉으라고 그렇게 만든 거야, 오케이"
사진을 찍고 걸으며 딸에게 아빠 의견도 들려준다.
"또또야, 아빠는 이런 동상이 좋아,
우뚝 선 동상은 우러러보지만, 가깝지 않잖아.
사진을 찍어도 콩알만 하게 나와.
그런데, 이런 동상은 눈높이가 맞잖아,
옆에 앉아도 보고, 쳐다보게 되고, 친근해지고...
위인을 기억하자고 만든 게 동상이면,
과연 어떤 동상이 더 자주 떠올리게 될까?"
동상이 우리 눈높이로 내려와 앉아둔 덕분에
딸은 염상섭 작가 옆에 앉아서 '함께' 사진도 찍고,
이마의 혹까지 발견할 수 있었다. 중학교 가면
염상섭 작가의 소설도 교과서에 나올 거라는 말에
기대를 가질 수 있었다. 그때 딸은 떠올릴 것이다.
그게 우리 곁에 있는 위인이지 않을까?
딸의 채근에 서둘러 교보문고로 들어갔다.
딸의 최애 쇼핑지는 귀엽게도 다이소와 아트박스.
들어갔다 하면 문구 코너에서 한참을 돈다.
아기자기한 팬시 용품을 꼼꼼히 다 들여다보고,
학용품에 대한 욕심도 크다. 날 닮았다.
최근에는 검은색, 필기감 좋은 필기구를 엄청 찾는다.
"또또야, 여기가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서점일걸"
"음... 책 말고는 없어?"
"또또 좋아하는 문구 다 있지. 엄청 클걸."
바로 지난주에도 우리 동네 교보문고에도 다녀왔지만,
딸은 그곳보다 훨씬 더 크고,
한 개 층을 다 쓰는 교보문고가 너무 좋아보였나보다.
아빠는 신경도 안 쓰고 한참을 혼자 돌아다녔다.
덕분에 혼자만의 여유 있는 교보문고 산책을 즐겼다.
'오래간만에 찾은 교보문고…
많이 바뀌었네, 그래도 사람 많네…' 싶다가
문득 든 생각은 고마움이었다.
요즘 종이책 파는 서점은 점점 없어지기만 하는데...
서울 중심가 한복판에 한 개 층을 통째로 서점으로,
내가 어렸을 때부터 한참 지난 지금까지도 이렇게
변신해 가면서 유지해 주는 것이 너무 고맙다...
딸과 똑같이, 문구 사무용품에 욕심이 많은 나도
어느덧 멀찌감치 딸의 뒤를 느긋하게 따라갔다.
그러다가 발견한 기억 보관함, 생각 보관함.
쉽게 말하면, 다이어리, 캘린더, 메모장이다.
뻔해 보이는 것에 새로운 의미로 이름을 붙였다.
잊히기 쉬운 '기억'과 흘러가기 쉬운 '생각'을
보관해두어야 할 거 같고, 그러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지금 내가 보관해야 할 기억과 생각은 뭐가 있을까?
우리 가족의 지난 1년... 파란만장했던 1년...
우선 내가 작년 여름을 기점으로 20년 광고인 생활을
마무리하고, 다른 진로를 준비하기로 결심했던 순간.
스트레스 많던 광고회사를 퇴사할 때 후배들의 환송회,
와이프와 딸이 열성을 다해 준비했던 퇴사 축하 파티.
그 후 온 가족을 벌떡 일어나게 만든 장인어른 뇌출혈.
보관함에 안 적어도 평생 못 잊을, 없으면 좋았을 기억.
지난 1년간 우리 가족생활을 결정지은 결정적 사건.
장인어른이 생사의 고비를 오가게 되면서, 내가 만사
제쳐두고 장모님과 함께 병원을 오가기 시작했다.
여전히 회사에 다니는 아내도 연차를 거듭 써가며
창원과 서울을 오가고, 장인어른 병원을 응급으로
서울로 옮겨서 또 병원을 오가는 생활을 지금 9개월째.
그 사이에 나는 인생 이모작에 대한 고민이 커지고,
아내도 직장과 집안일 스트레스가 겹쳐서 우울해지고,
그러다 보니 딸에 대한 관심과 케어가 약간 느슨해지고
있다 느끼던 터였다. 그럼에도 잘해주고 있지만,
어찌 되었든 가족 모두가 예년과는 다른 생활을 해오고
있던 터였다. 다행히 장인어른은 충분한 차도를 보였고,
지금은 우리 가족 돌파구가, 리프레쉬가 필요한 시점.
이 기억과 이 생각을 보관하는 일은 우리 가족에게는
절대적으로 해피 엔딩이 되어야만 하는 일. 우리가
그걸 위해 뛰어왔고, 지금 한번 쉼표를 찍어야 할 시점.
이번 우리 여행의 목표는 이거구나 싶었다.
교보문고에서 또또와 함께 즐길 수 있는 것은 생각 외로
많았다. 도장 찍기도 하며 온갖 책을 둘러보는 것만으로
또또에게는 새로운 세상이었다. 학용품과 문구용품 외
새로운 자극제가 구석구석 담겨있었다. 다음에 또, 꼭!,
다시 오자는 약속을 하고서야 문 밖을 나설 수 있었다.
"또또야, 이거 사진 찍어봐."
"어디? 이게 뭔데?"
"이건 뭐 교보문고 슬로건이지.
이게 무슨 뜻일까? 이건 쉬운 질문이지?"
여행은 다음 편에도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