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너스하이.
러너스 하이(Runners’ High)란 통상 30분 이상 달릴 때 얻어지는 도취감, 혹은 달리기의 쾌감을 말하며 운동 하이(Exercise High), 러닝하이(running high), 조깅하이(jogging high)라고도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러너스 하이 (시사상식사전, pmg 지식엔진연구소)
얼마 전, 아니 사실 꽤 오래전, 우리 주인님이 넘치는 탐구력으로 방충망을 찢어먹었다.
다행히 이번 여름이 너무 더워 문을 거의 닫고 에어컨을 켜고 살았기 때문에 일상생활에는 크게 문제가 없었다.
그래도 자가가 아닌 탓에.. 그냥 얼른 고쳐야지 고쳐야지만 하고 있었다.
이제 가을이 되고 여름내 잠재되어 있던 비염이 심하게 발현(?)하고
더 이상 에어컨 바람을 쐬고 싶지 않은 맘이 컸던 터라 어떤 트리거만 있으면 당장 실천할 문제였다.
그러다 그동안 읽어오던 밀란 쿤데라의 '불멸'을 완독 했고,
그 불멸을 해석하고 소화하는 과정에서 머리에 과부하가 왔고 나는 혼란을 크게 느끼며 더 이상 가만히 앉아있을 수 없겠다 싶어 카페를 뛰쳐나가 철물점을 찾기로 마음먹었다.
한 여름에는 감히 아스팔트 위를 오후 두 세시 경에 걸을 생각조차 하지 못 했는데 역시 가을이 왔는지 우리 동네를 한 두 바퀴 걸어 다닐 수 있었다.
그렇게 철물점을 찾아 한참을 두리번거리며 동네를 휘졌고 다녔다.
겨우 한 곳을 발견했는데 문을 닫았더라지.
문제해결력 하나는 뛰어나다고 생각하는 나는 잠시 멈춰 생각을 했다.
나 스스로에게 감탄하며 생각해 낸 방법은 '동네 어르신들에게 묻기'였다.
'이 동네 오래 사신 어르신들은 아실 거야.'
한 동네에 오래 사신 어르신들은 분명히 동네에 대해서 알려주기를 좋아하실 것이라는 게 나의 확신.
우리 아빠만 봐도 부산에 대해서 물어보면 알려주면서 신나 하는 게 보이는 것 같다.
그래서 길에 앉아계시는 적적해 보이는 어르신들을 보고 물어볼만하겠다는 판단이 서는 순간 자연스럽게 그 어르신들에게 다가가 웃는 얼굴로 여쭈었다.
"안녕하세요, 제가 이 동네 산 지가 얼마 안 돼서 그러는데, 혹시 철물점 아는 데 있으실까요?"
그렇게 물색한 몇 분과의 대화에서는 그냥 스몰토크만 하고 철물점의 위치는 안타깝게도 얻지 못했다.
하지만 주책바가지인 나는 그런 대화를 하면서 쓸데없는 소리도 해가며 즐겼고, 약간의 힐링을 했다.
어쨌든 그렇게 입을 좀 털어주고 나는 가까운 곳에서 편하게 수리하기를 포기하고 방충망을 뽑아 들고 철물점을 찾아가기로 했다.
집에서 방충망을 뽑는 순간, 나가 알파걸이라는 생각에 도파민이랄까 아드레날린이랄까 뭐 아무튼 어떤 호르몬이 뿜어져 나오며 내 스스로가 너무 자랑스러웠다.
그렇게 방충망을 뽑아 들었는데 내 키보다 컸다.
그래, 내가 들락날락거리던 발코니 샷시에 내 머리가 닿은 적이 없었지.
뭐가 됐든 일단 뽑았으니 그 방충망을 들고 나섰다.
1km 정도 (그냥 걸으면 당연히 짧지만요, 방충망 커다란 걸 들고 걸으려니 멀더라고요.) 굴다리도 건너고, 건널목도 몇 개 건너고 해서 나오기 직전 전화해 둔 철물점을 찾아들어갔다.
사모님께서는 내 몰골을 보고 이 방충망을 들고 어디서부터 걸어온 거냐면서 애처롭다는 눈빛으로 휴지를 뜯어주셨다.
나는 그것조차 뿌듯해서 "저는 수리할 수 있음에 감사드려요!"라는 쓸데없는 소리를 하며 휴지로 땀을 닦았다.
휴지는 조금 저렴한 것이었는지 얼굴에 마치 토핑처럼 들러붙었고 그걸 또 사모님은 떼주려고 하셨다.
아무튼 그렇게 찾아간 철물점에서 나는 수리를 하자마자 방충망을 들고 집으로 돌아오고 싶었는데 사장님을 찾아서 철물점으로 데려오라고 하셨다..
사장님이 바깥에서 일을 보시는 중이었는데 아마 내 몰골을 보고는 안타까운 마음에 바로 해주실 것이라 생각하셨던 듯하다.
(그래도 사모님이 사장님한테 전화는 해준다고 하셨다. 그니까 나한테 뭘 시켜먹으신 건 아니다. )
그래서 사모님이 알려주시는 대로 사장님이 일하고 계신 곳을 찾아 약 5분을 걸어갔다.
사장님은 전화를 이미 받으셨는지 '방충망이세요?' 하면서 나를 먼저 아는 척하셨고,
'방충망은 아니고 사람인데요..'라는 쓸데없는 소리를 할까 하다가 아니다 싶어 "네!"만 외쳤다.
사장님께서는 "아이고 여기 일을 벌여놔 가지고.. 지금 바로 해드리기는 좀 어렵고 내일 가져다 드릴게요.."라고 하셨다.
사실 그 커다란 방충망을 들고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에 두려움이 앞섰던 나는 그 방법이 훨씬 좋다고 느꼈다.
그리고 사장님이 일을 보고 계셨던 곳 근처에 있는 카페에 들어가 '토마토주스' 한잔을 시켰다.
이 와중에도 나는 방충망과 함께 책을 들고 갔고, 에어컨 밑에서 책을 펼치고 '토마토주스'를 마시는데
충격적으로 행복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 그래서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은 이런 게 달리는 사람들이 느낀다는 '러너스하이'와 비슷한 게 아닐까.
'방충망수리스하이'
미루던 방충망 수리를 맡기고 느끼는 행복.
음?
이러나 저러나 방금 모셔온 수리된 방충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