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부터, 인간관계를 형성할 때 개인 대 개인의 만남에서 편안함을 느낀다. 가장 불편한 상황은 친구가 모르는 친구를 데려와 날 모두의 친구로 만들고 싶어 할 때다. 특히 미리감치 예고되지 않은 상태에서 발생하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인간관계는 언제나 나를 당황시킨다. 내가 원해서 맺지 않는, 자의적 인간관계 이상의 관계 맺기는 아직도 부담스럽고 두려운 면이 있다.
카톡을 해 본 적은 없지만, 카톡을 시작하는 순간 이런 ‘비자발적 인간 관계망’이 펼쳐지는 게 아닐지 고심하게 된다. 카톡은 자신의 전화번호를 알고 있는 이들과 자동적으로 연동된다는 말을 들어서다.
물론 전화번호 목록에 들어있는 이들은 나와 교류한 적이 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전화번호까지 등록된 사이였음을 전제할 때, 그들과의 연결이 왜 비자발적인 인간관계인지 의아할 수 있다.
그러나 전화번호 목록을 한 번 훑어보자. 반드시 내가 연락처를 교환하고 싶어 그 목록에 등재된 이들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다수가 상황에 따라 연결되고 필요에 따라 저장된 번호들이다.
그러니 카톡은 하고 싶지 않아도 전화번호 목록에서는 지울 수 없는 번호들도 있는 법. 예컨대 개인적인 관계를 맺을 필요 없는 상점이나 공공 기관의 경우에는 굳이 카톡을 연결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게다가 누구의 휴대폰에나 한 둘은 있을 법한, 전화번호 명단에는 있으나 5년, 길게는 10년 이상 만나거나 연락을 하지 않은 이들에게, 갑자기 내가 카톡을 시작했다며 울리는 “카톡!” 소리는 얼마나 그들을 당황시킬 것인가.
설사 카톡 연락을 받은 것을 차마 모른 체할 수 없어 그에 답한 것을 계기로, 그토록 소원했던 사이가 갑자기 메워져 버리는 일이 벌어진다 해도 그것은 한 편으로는 기쁘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민망한 일이기도 할 것이다.
언젠가 아버지께 이런 식의 인간관계에 대해 여쭤본 적이 있다. 아버지께서는 일찌감치 스마트폰과 더불어 카톡 사용에 있어서도 베테랑급이 되신 지 오래. 나보다도 훨씬 신세대인 미디어 소비자이시다.
“물론 연결은 되지만, 내가 열어주지 않으면 반드시 서로 소통할 필요는 없단다.”
‘아, 열어주지 않는다? 그럼 선택권이 있기는 한 것이군?’이라는 생각에 나는 다시 여쭤보았다.
“그럼 카톡을 열어주지 않은 상대방이 서운해하지는 않나요? 그럴 땐 어떻게 하시는데요?”
“난 대부분 동창들이나 친구들에게 다 열어두지.”
‘다 열어둔다? 그럼 결국 선택권이 없는 것이군...’
생각이 복잡하고 불필요한 상상에 줄곧 휘둘리곤 하는 나로서는 카톡의 근원이 되는 모든 이들의 전화번호를 스스로 제어할 자신이 없으며, 그들 중 누군가를 선별해 낼 자신은 더더욱 없다. 나의 고민은 보통 이런 것들이다.
행여 내가 카톡을 열어주지 않은 상대방이 나와 연락을 하고 싶어 한다면?
(사실 이런 일이 있을 리는 만무하다)
소원해진 관계 자체도 서운한 마당에, 개시된 카톡 명단에서 제외된 걸 알면 더 서운하지 않을까?
(사실 이런 일로 서운해할 만한 사이라면 그 사이에 한 번은 연락을 했을 것이다)
당시에는 꼭 연락을 했어야만 했던 사이지만 지금은 만날 필요가 없는 상대라면?
(사실 이런 번호는 그냥 지워버리면 그만. 진즉에 지웠어야 했다)
나보다 연장자이신 분들께 갑자기 이런 알림이 간다면 어째 좀 어색하지 않을까?
(사실 카톡 이용자들은 이런 연락을 수시로 받을 것이다. 다만 왜 이제서야 카톡을 시작한 건지 의아해하실 수는 있겠다)
이어지는 고민과 우문우답 속에서 나는 결국 가뿐하게 포기하는 편을 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