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 관리 3개조
여전히 '실패'에 대한 생각을 놓지 못하고 있다. 사업에 실패한지 5년이 지났고, 그 시간 내내 주춤주춤 물러서기만 하면서도 '도대체 왜 실패한거지?' 라고 끊임없이 물었다. 자존심이 상했기 때문이다. '나 잘나가던 사람이었는데'하는 자존심, 서 푼도 안되는 알량함이 밑바닥에 가득 고여있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오랫동안 붙들고 있던 보람이 있어 작은 교훈을 얻었다. 비록 한 번 실패했지만, 커머스의 영역을 떠나지 않고 오래 고민한 덕분이다. 고민의 결과는 바로 '관계'에 대한 깨달음이다. 구체적으로는 커머스 영역의 소비자, 공급자, 그리고 중개자 간에 다양한 형태로 만들어지는 '관계'를 관리하는 방법이다.
방법을 엿보았으니 이제 한발 나아갈 수 있는 자세를 갖게 되었다. 아니, 적어도 물러나지는 않을 작정이다.
1조 : 대화의 주제는 내가 아니라 <당신>이다
내 직업은 MD(Merchandiser)_즉 상품 기획자이다. 상업(커머스)의 영역에 있다.
MD들이 서식하는 커머스 플랫폼은 상거래를 동력으로 작동한다. 페이스북, 인스타그램과 같은 SNS플랫폼이 '나'를 중심으로 한 '자랑(질)'을 동력으로 작동하는 것과는 결이 다르다.
매장으로 생각하면 쉽다. 매장에 손님이 들어오면, 판매원은 눈을 마주치며 인사한다. '어서 오세요'
'편하게 둘러보세요'와 같은 멘트를 덧붙이기도 한다. 시선은 줄곧 손님의 발걸음 혹은 시선을 따라다닌다.
이렇게 커머스에서의 대화는 'I'가 아니라 'You'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하지만 과거의 나는 너무 잘난 나머지, 대화의 중심에서 'You'를 밀어내고 'I'를 올리곤 했다. 커머스에서 이러한 행동은 실패의 지름길이나 다름없다.
커머스 플랫폼의 주인은 예나 지금이나 <당신>이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당신>을 중심으로 한 대화라는 측면에서 볼 때, e커머스는 여전히 갈 길이 멀다. 오프라인 매장처럼 낮은 자세의 스킨쉽이 불가능하다는 핸디캡이 있음에도 승승장구하는 이유는 모바일 디바이스를 통해 구현되는 편리함에 있지만, 편리함의 이점은 조만간 사라질 것이다. 실제로 탐색부터 결제까지 고객이 모든 것을 다 해야 한다는 모순을 깨달은 소비자들이 많아졌으며, 성숙 시장에서의 경쟁은 커머스의 본질로 치달을 것이 분명하다.
나는 네이버 스토어가 푸드윈도의 생산자들이 시도한 대화에서 성장의 시금석을 마련했다는 생각을 한다. 세련미와는 거리가 먼 투박한 표정의 생산자들이 얼굴을 드러내며 "저는 ooo입니다"라고 말을 걸어주자 마치 마법처럼 온라인에서 신선식품이 거래되기 시작한 것이다. 네이버가 시작은 아니지만 적어도, 신선식품 온라인 진입의 Boom-up에 있어 매우 유능한 플레이어였다는 사실만큼 분명하다.
그러므로, 이커머스에 진입하려는 판매자들께 조언을 하나 하자면, "자랑(질)을 하시려거든 인스타에 가서 하시고, 커머스에서는 겸손하고 친절하게 말을 붙이려는 노력을 먼저 하시라"
또한 MD는 자랑을 앞세운 화려한 마케팅이 아닌, 상품의 본질에 천착하는 판매자들을 중심으로 큐레이션에 몰입해야 한다.
2조 : 나를 낮추고 상대방을 높인다
"자존심의 꽃이 떨어져야 인격의 열매가 맺힌다" 이 말은 김창옥씨가 본인의 유명한 강의에서 던졌던 화두이다. 김창옥씨는 강의를 듣고 나면 그냥 잊어버리라 했지만, 나는 꽤 오랫동안 이 말을 지우지 못했다.
그러던 중 붙임성 좋은 후배 A를 보며 크게 한 수 배웠다. 나 혼자는 도저히 성사시키지 못했던 기획을 후배와 함께 하면서 최상의 결과로 이끈 것이다. 과거의 나라면 '아 역시 나는 잘났구나'하는 자존감의 고양에 취했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나는 이미 쓰디쓴 실패를 맛보지 않았던가.
커머스, 상거래는 결코 혼자 할 수 없다. 반드시 상대방이 존재한다. 단수가 아니라 다수의 상대방이 존재하기 때문에 내가 주인공이 될 기회는 흔하지 않다. 스스로 기획을 잘한다고 평가한 나는 주인공이 될 자격이 충분했지만 결과는 참담한 실패였다.
겸손하고 친절한 후배 A는 낮은 자세로 상대방을 높이곤 했다. 낮은 자세가 비굴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겸손이란 자세를 낮추되 비굴하지 않은 것이며, 과례는 비례라고 했다. 다만, 주인공을 노리는 마음을 버리면 된다. 주인공은 상대방에게 양보해야 한다. 물론 양보가 그렇게 쉬운 일이었다면 교과서에 실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너무 쉽게 말했지만 실패의 아픔과 양보의 상실감을 비교해보면 답은 정해져있다는 사실이 명쾌하게 나올 것이다.
작은 성공을 경험하면서 시들대로 시든 자존심의 꽃이 드디어 떨어졌다는 느낌이 들었다. 열매가 맺힐지는 두고 볼 일이다. 다만, 연기가 아니라 진심으로 "당신"을 높일 수 있다면 반드시 성공에 근접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의 <당신>은 소비자가 아니라 셀러 혹은 생산자이며, 제휴와 연대의 모든 상대방을 의미한다. 이것은 커머스에서도 특히 e커머스의 영역에서 더욱 중요하게 작용하는 개념이다. 대개의 경우 오프라인 커머스는 리테일(Retail) 방식의 '공급-사입' 구조로 이루어 진다. 사입하는 쪽이 공급자에 대해 헤게모니를 가지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이커머스의 경우는 상거래 플랫폼의 가장 중요한 두 축이 셀러(판매자 혹은 공급자)와 소비자이다. 플랫포머의 헤게모니는 큐레이션 기능을 통해 발현될 수 있지만 소비자의 자발적인 검색과 탐색이야 말로 헤게모니를 쥐고 있기 때문에 MD의 말 한마디보다 실제 구매자의 리뷰 한마디가 훨씬 무게감을 가진다. 그러므로 커머스 플랫폼의 MD들은 전통적인 '리테일 MD'와 대비하여 '플랫폼 MD'라는 명칭을 소개란의 맨 앞에 두어야 한다. 그리고, 셀러(판매자 혹은 공급자)와의 적극적인 제휴와 연대를 모색해야 한다.
3조 : 관계는 맺는 것이 아니라 관리하는 것이다
학교를 졸업한 지 20년이 다 되어 가는데도 여전히 동창회가는 태도로 회사에 다녔다. 원하건 원하지 않건 관계를 맺어야 했고 대부분 힘들었다. 친한 친구 옆에 당연하게 내 자리를 찾아 비집고 들어가듯, 회사에서도 편한 관계를 찾아 헤맸다. 힘든 관계를 피하다보면 동질감이 느껴지는 불평 불만을 중심으로 모이게 마련이다. 그 결과 관계는 더욱 악화되곤 했다.
관계 악화의 결과는 도피로 이어진다. 동굴로 숨어버린 채 자기 일만 열심히 하는 것으로 성실함에 도취해버린다. 다 같이 모내기하는데 혼자만 우물 파는 격이다. 도피가 아니라 탈출로 이어지기도 하는데 내 경우는 심각하게도 둘 다 했다. 이렇게 정리하면 그 결과가 실패라는 것이 분명하게 드러나지만, 대부분의 도피와 탈출은 화려하게 포장되곤 한다.
'나는 아니야'라고 생각하겠지만, 가깝게는 팀 동료들, 멀게는 유관 부서의 협업 직원들까지 포괄적으로 경험해본 결과 대다수의 사람들이 소극적으로 관계를 맺고 있다. 냉혹한 야생에 가까운 생존의 현장에서조차 관계를 착각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선을 지키기만 하면 안전이 어느 정도 보장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관계에 소극적인 태도로 임해도 되는 사람들은 매우 한정적이다. 그들은 압도적인 업무 능력을 가졌거나, 아니면 위계 권력을 확보한 극소수에 불과하다. 따라서 대다수인 나머지는 언제 어떻게 될 지 모르는 위태로운 안전을 담보로 관계에 소극적인 순진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순진한 표정으로 옆사람과 잡담을 나누며 줄을 서있다. 앞사람이나 뒷사람과는 데면데면 대화조차 시도하지 않으니 어디로 가는 줄인지도 모르는 사람이 태반이다. 실패로 가는 길에 줄을 서지 않으려면 관계에 대한 관점을 바꿔야 한다.
관계는 관리하는 것이다. 내가 아닌 <당신>을 중심으로 대화를 이끌 수 있어야 하고, 나보다 상대방을 높이는 겸손한 태도를 갖추어야 한다. 관리의 주체는 '나'이지만, 주인공은 동료, 상사, 후배이며 유관 부서의 직원들이다.
커머스 플랫폼의 MD는 소비자와 판매자의 거래를 촉진하는 중개자의 역할을 대표적으로 표방하고 있는데, 앞으로 펼쳐질 커머스의 미래를 전망해보면, 인간 MD 직업적 공간은 줄어들고 인공지능이 중개는 물론, 큐레이션의 역할까지 모두 가져갈 것이라는 견해가 우세하다.
하지만 커머스의 본질이 상거래에 의한 연결이라는 사실에 집중해보면 인간 MD의 직업적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다. 커머스 플랫폼에 입장한 소비자, 생산자, 판매자 모두를 아울러 주도적인 관계 관리를 하는 것이다. 중개자가 아니라 상거래의 또다른 가치를 만들어내는 것을 의미한다. 구체적으로는 이번 코로나 사태의 초기에 등장한 불량 마스크, 폭리 마스크를 퇴출시키는 자정 활동, 판로가 막힌 농수축산물에 유통의 숨통을 틔워주는 지원 활동 등을 의미한다. 이러한 활동은 적극적인 제휴, 연대를 통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에 소극적인 관계맺기가 아닌 넓은 시야의 관계 관리가 필수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