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경계는 거의 사라진 상태이다. 싸움의 전선이 희미해진 것이다. 이제 커머스 분야에서 벌어지고 있는 치열한 경쟁은 온라인과 오프라인 기업들간의 싸움도 아니고, 새로운 고객을 영입하기 위한 경쟁도 아니다. MD의 업무 중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여겨지는 독점적 상품 차별화나‘최저가’도 아니다.
훨씬 중요한 문제가 싸움의 표면에는 드러나지 않은 채 작동하고 있었다. 큐레이션이다.
결국 소비자가 납득하고 동의할만한 선별/정제의 기준을 수립하여 실제로 작동시킨 쪽이 이길 것이다. 필요한 것이라면 뭐든지 선택할 수 있을 만큼의 엄청난 수의 다양성을 보유하고 있음에도, 쉽게 찾고, 별다른 고민없이 간편하게 고를 수 있다는 장점은 굳이 수고스럽게 비교해보지 않아도 되는 최저가와 함께 빠른 배송 서비스로 묶여 엄청난 시너지를 만들어낸다.
여기서의 큐레이션(선별/정제)은 알고리즘의 영역이다. 인간 MD가 끼어들 여지는 보이지 않는다. 큐레이션의 영역에서 인건비가 많이 들어가는 MD들은 배제되는 경향이 강하게 나타나는 것이 현실이다. 수백 만개의 상품, 셀러가 활동하는 플랫폼에서 인간 MD들이 수동으로 할 수 있는 일은 극히 제한적이라는 관점이 지배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첨단기술이 보편화되어 첨단이 아니게 되면 어떻게 될까?
물류센터에서 직원의 집품 경로(picking path)를 최적화하기 위해 사용하는 알고리즘, 고객에게 구매량을 추천하기 위해 과거 정보를 사용하는 알고리즘, 각자의 구매이력이나 검색 데이터를 기초로 고객들에게 어떤 혜택이나 할인을 제공할지 결정하는 알고리즘 등 누군가 먼저 시작했던 혁신이 이제는 누구나 시행하고 있는 보편적 기술이 되었다.
미국, 중국, 일본의 사례와 달리 한국 커머스 시장의 승자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 쿠팡으로 기운듯 했으나 네이버가 치고 나왔고 카카오의 플랫폼 파워는 향후 커머스 분야에서도 영향력을 확대할 것이다. 지금 당장은 격차가 벌어질 것처럼 보이지만, 간격은 금세 좁혀질 것이다. 완전한 승자는 어디에서도 출현하지 않을 것이며, 물고 물리는 치열한 경쟁 역시 멈추지 않을 것이다.
기술적 선도를 통한 시장 장악이 불가능해지고 경쟁이 종식되지 않는 상황. 바로 이 지점에 인간이 설 영역이 만들어진다. 차별적 경쟁력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하다는 의미는 곧 알고리즘에 의한 유사한 큐레이션이 아닌 독특한 관점의 가치 제공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인간 MD들은 이 영역에서 자신만의 큐레이션을 만들어가야 한다. 선별하고 정제하는 자신만의 기준을 수립하고, 가치(대단한 이상이 아니라 보편적 가치에 접근한 가장 인간다운 가치)를 더해 배치하는 큐레이션을 해낼 수 있다면 상품기획 ‘전문가’로서의 위상뿐아니라 커머스의 미래가 인간에게 유익한 방향으로 길을 잡는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앞선 기술이 순식간에 따라잡히고 마는 찰나의 차별화에서 벗어날 수 있는 중요한 방편이 될 것이다.
핵심은 가장 인간다운 큐레이션에 있다.
2. 인간 MD의 직업적 소명
큐레이션은 맥락을 연결하여 조합하거나 통합함으로써 새로운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일이며 고도의 전문성과 감각이 필요한 일이다. 여기에 더해 통찰력과 직관, 개성에 의한 독특한 관점이 없다면 흥미롭지 않을 것이다.
광범위한 탐색을 통해 최적의 결과를 찾아주는 큐레이션은 알고리즘이 인간보다 훨씬 잘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알고리즘의 유일한 약점은 감동적이거나 우연한 기쁨을 주지 못하는 것뿐이다.
한편 상업의 역사에 나타난 큐레이션은 대를 이어 전승한 상인정신이다.
이스탄불의 그랜드 바자르, 도쿄의 츠키지, 시애틀의 파이크 플레이스, 베트남 껀터의 까이랑 수상시장 등 세계의 유서깊은 전통시장에서 활약해온 상인들은 기나긴 시장의 역사 속에서 대를 이어 큐레이션 활동을 진행해왔다.
매입할 물품을 선별하고, 공급처를 확보하며, 보유수량과 물량점유의 규모를 기준으로 판매할 가격을 정하고, 어디에 어떻게 배치(진열)하여 판매할 지를 판단하여 결정하는 큐레이션 활동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누적된)경험이며, (순간에 대응하는)직관이다. 대를 이어 전승한 상인들의 큐레이션은 오랜 경험에 의해 형성된 보편적 가치에 기반하며, 유행과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응한다.
직업적 발생으로부터 약 150여 년에 이르도록 여전히 직업적 소명을 세우지 못한 현대의 MD들이 큐레이션이라는 역할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상업의 역사에서 찾아볼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시장 기능이자, 상품과 시장(플랫폼)이 아닌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역할이기 때문이다.
결국 인간 MD들이 설 자리를 찾고, 직업적 소명을 세우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일은 큐레이션이 될 것이다. 물론 누구나 다 찾는 큐레이션이 아니라, 독특한 관점이 첨예하게 살아 있어 감동을 선사하는 큐레이션이 된다는 조건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