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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반딧불이

19

by 판도


무더위가 이어지며 7월 말 역대 최고 기온을 연이어 갈아치우고 있었다. 그날도 아침 뉴스의 일기예보에서는 서울의 낮 기온이 영상 38도에 이르러 지난주에 경신한 최고 기온을 넘어설 것이라고 하였다.

여름 방학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고3 수험생의 여름 방학은 쉬는 시간이 아니었다. 쫓는 자와 쫓기는 자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는 시간이었다. 공부를 잘하는 아이들은 교실을 어슬렁거리며 여유를 부렸지만 실제로는 자신과의 싸움에 매몰되어 있었고, 실력이 부족한 아이들은 그 어느 때보다 집중하며 만회의 시간으로 삼았다. 한편 대입을 포기한 아이들은 한결같이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그중에는 취업을 준비하며 학원에 다니는 아이들도 있었다. 기만도 자동차 정비학원엘 다니기 시작했다고 하였다.


그날도 하모는 학교에 나왔지만 멍하니 창밖만 바라보았다. 방학이라고 바뀐 것은 없었다. 영어 교과서를 펼치자, 민 선생이 떠올랐다. 하모에게는 묘한 징크스가 하나 있었다. 어떤 과목이든 담당 선생이 좋아지면 그 과목은 항상 성적이 좋았다. 영어도 그랬다. 영어라는 과목을 좋아하기는 했지만 성적이 좋은 편은 아니었다. 그러던 것이 민 선생을 만난 1학년 이후 성적이 눈에 띄게 좋아지기 시작했다. 고2 때는 반에서 영어 하면 조하모를 찾았다. 그렇지만 시련은 곧 찾아왔다. 노처녀였던 민 선생이 결혼한 것이었다. 다시 영어 성적이 곤두박질쳤다. 친구들이 모르는 것을 물어와도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민 선생 탓이었다. 겨울 방학이 되어 민 선생에게 편지를 썼다. 그렇다고 연애 따위의 이상한 감정은 없었다. 나라는 존재에 대한 고민, 진로에 대한 고민을 적었다. 그리고 개학을 며칠 앞두고 그녀로부터 답장을 받았다. 제자의 앞날을 응원하는 짧은 편지였지만, 하모는 기뻤다. 그리고 고마웠다.


하모는 영어책을 덮고 소설책을 꺼내 들었다.


“어이, 귀공자!”


“아, 깜짝이야.”


소스라치게 놀란 하모가 고개를 돌리니 어깨에 가방을 멘 공산이 웃으며 서 있었다.


“뭘 그렇게 놀라셔?”


“응, 아니야. 그냥.”


“책 읽고 있었구나. 공부는 다 끝낸 거야? 대단한데. 그런데 무슨 책이야, 이번엔?”


“데미안.”


“또 데미안? 그거 다 읽지 않았어?”


“읽긴 읽었지. 그런데 하나도 모르겠어. 다시 읽고 있는데 에바 부인만 떠오르고.”

농담처럼 말했지만 하모의 뇌리에는 정말 에바 부인만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녀는 싱클레어가 흠모했던 데미안의 어머니였다.


“너도 연상의 여인이 좋은 거야?”

공산이 싱긋거렸다. 그는 하모가 민 선생을 좋아했던 것을 모른다. 짐작은 할지 몰라도 하모가 직접 말한 적은 없다. 따지고 보니 연상의 여자가 맞긴 했다.

“나도 그 책을 몇 번이나 읽었어. 쉬운 책이 아니더라. 그러면서 작가인 헤르만 헤세를 생각했지. 그가 싱클레어이면서 데미안이었고 데미안이면서 프란츠이지는 않았을까 하는…. 그는 소설에 여러 인물을 등장시켰지만 결국은 그들 모두가 헤르만 헤세의 분신이 아닐까 생각한 거지. 그럼 우리 머리 좀 식히러 나갈까?”

“어? 너 방금 왔잖아. 공부는?”


“내가 지금 공부한다고 엄마가 원하는 대학에 들어가겠냐? 나가자.”

거리에는 추적추적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들은 택시를 타고 종로 3가에서 내렸다.


“뛰자!”라는 말과 함께 공산이 하모의 손을 잡고 달리기 시작했다. 젖은 바닥을 발로 구를 때마다 빗물이 튀었다. 우산을 쓰고 그들 곁을 지나가던 사람들이 눈을 흘겼지만,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비 오는 거리를 질주했다.

한참을 달려 후미진 골목 끝자락에 이르러서야 공산이 하모의 손을 놓았다. 그들 앞에는 낡은 건물 한 채가 버티고 서 있었다. 공산이 숨을 헐떡거리는 하모를 이끌고 건물 지하로 내려가자, 극장에서나 보았던 육중한 방음문이 나타났다. 공산이 두 손으로 힘껏 문을 당겼다.


문은 요동치는 소리를 가둬 놓은 둑이었다. 둑이 터지자, 어둠 속에서 쏟아져 나온 살아 꿈틀대는 소리 덩어리가 성난 파도처럼 그들을 덮쳤다. 하모는 방음문 손잡이를 부여잡고 쓰러지지 않으려 사력을 다해 버텼다. 그들을 덮친 것은 환희였고 피할 수 없는 전율이었다. 귀청을 찢는 듯한 금속성 기타 소리였으며, 세상을 부술 듯한 드럼 소리였고, 짐승과 같은 인간의 울부짖음이었다. 공산은 몸서리치는 하모를 바라보며 빙그레 웃고만 있었다.


어둠에 익숙해지며 실내의 모습이 하나둘 눈에 들어왔다. 여전히 어두웠지만 터질 듯한 음악 소리 사이사이에 많은 사람이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어떤 이는 노래를 따라 부르는가 하면 또 어떤 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기타를 치는 듯한 흉내를 내며 머리를 어지럽게 흔들어 댔다. 하모는 눈앞이 어질어질했다. 귀청을 찢을 듯한 음악 소리에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가 커졌다.


“여기가 대체 어디야?”


공산의 목소리가 소음을 뚫고 대답했다.


“응. 록카페 볼카노.”


“록카페?”


“처음이야? 로큰롤이나 메탈 음악 틀어주는 술집. 내 청춘의 해방구지. 저기 유리 상자 같은 거 보이지? 저 안에 있는 디제이가 노래를 트는 거야. 신청해도 들려주고.”


“음악다방 같은 거?”


“그렇지. 엄청나게 시끄러운 음악다방이지. 거긴 가봤어?”


“어? 아직.”


하모는 여전히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며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공산의 눈이 커졌다. 그의 시선이 하모를 향했다.


“담배 피워?”


“응.”


“혹시 안 선생님 때문에?”


하모가 고개를 저었다.


공산은 하모를 빤히 쳐다보더니, “그래, 술이나 마시자.”라며 테이블 위 작은 등을 들고 흔들었다.


“난 오렌지 주스.”


“좋아.”


공산은 하모에게 술을 권하지 않았고, 담배를 피우지도 않았다. 그러나 실내는 담배 연기로 자욱했다. 이런 세상도 있구나 하고 하모가 감탄할 때 공산이 목청을 돋웠다.

“여기 오는 사람들은 대학생과 젊은 직장인들이야. 꼰대들은 음악 소리에 놀라 도망을 가버리거든.”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는 하모에게 공산이 물었다.


“뭐 듣고 싶은 노래 없어?”


“노래? 글쎄.”


“온 김에 한 곡 듣고 가야지.”


“그럴까?”


“여기 적어. 내가 신청해 줄게.”


공산은 메모지와 볼펜을 내밀었다.

하모는 머뭇거리다가 물었다.


“그런데, 시끄럽지 않은 노래도 돼?”


“시끄럽지 않은 노래? 가능해. 블루스 록도 종종 틀어주니까. 애들 껴안고 춤추라고 말이야.”

공산이 키득거렸다.


“그게…. 내가 듣고 싶은 노래는 독백인데.”


공산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뭐, 독백? 산울림의 독백?”


“응. 안 되겠지?”


“글쎄, 이상하기는 한데.”


“그러면 너 듣고 싶은 노래로 해.”

“아니야. 귀공자님이 듣고 싶다는데.”

볼펜을 입에 물고 잠시 생각하던 공산이 메모지를 끌어당겼다.

“그래! 안 되는 게 어딨어? 신청해 보자.”


잠시 후, 디제이 박스에서 돌아온 공산이 브이 자를 그리며 환하게 웃었다.


“기다려 보자. 디제이 누나가 오늘만 특별히 틀어준대. 자, 건배!”


볼카노는 흥미로운 곳이었다. 두 사람이 건배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하모의 신청곡, 독백이 흘러나왔다. 춤을 추는 사람은 없었다. 하모는 담배를 입에 물고 성냥불을 붙였다. 소음이 사라진 널따란 홀에 조용히 울려 퍼지는 노래는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하모 혼자만이 듣던 독백이 아니었다. 많은 사람 속에 파묻혀 커다란 스피커에서 나오는 이상한 독백을 들으며, 하모는 깊고 나른한 잠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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