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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영수 May 05. 2024

[1]

세 시간 남짓 기차로 이동했을 뿐인데 공기가 사뭇 차가워졌다. 나는 그 이유를 선입견에 기대어 도시의 바람이 핥고 온 사람들의 온기가 부족해 그렇게 느껴지는 것이라고 무책임하게 생각했다. 대합실을 빠져나오자 시선 닿는 대부분이 생경했다. 나는 혼자서 생경과 상경의 닮은 말맛에도 그 이유가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서울에 온 것이 처음은 아니었다. 30여 년 생애 그간 출장으로도 여러 차례 온 적이 있고 청와대 방문이 허용된다는 소식에 친구들과 여행을 왔던 때가 1년도 채 되지 않았으니 타 도시들에 비해서 서울은 친숙하다는 마음마저 품게 되는 곳이었다. 하지만 양손을 짐에 빼앗기고 막 뜯은 담뱃갑처럼 빽빽한 지하철 안에 몸을 말아 넣은 후 맡아진 비릿한 냄새는 분명 낯선 것이었다. 그것은 아마 나의 경계심이 피부로 뭉쳐 꽉 다문 입술 근처에서 풍겨오는 것일지도 모른다. 지방 생활을 정리하고 이곳에 서 있는 이상 나는 이 도시에서 이전처럼 유영할 수 없는, 서울이라는 블랙홀에 이끌린 수많은 소행성 중 하나인 것이다.

 나의 상경에 분명한 목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굳이 이유를 찾는다면 사유의 기저는 ‘가야 한다.’ 보다 ‘떠나야 한다.’에 깔려 있을 것이다. 그 당시 나에게 있어 생활이란 것은 기차의 선로 위에 올라온 것과 같았다. 스스로 올려놓은 뒤 그것이 재미없는 놀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창밖으로 간간이 보게 되는 풍경에 만족하고 있었다. 그때 나는 만약 계속해서 이 궤도로 돌게 되어도 그것이 흘러가는 이 시간처럼 익숙해져 곧 창이 잘 보이는 공간을 찾아 알맞은 의자를 두는 삶을 준비하고 말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린아이가 두꺼비집을 애써 만들어 놓고 부수는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지인들과의 송별회 자리에서 무엇 하러 서울에 가느냐에 대한 질문에 앞선 생각을 부러 말하고 싶진 않았다. 그때마다 나는 어느 만화의 한 장면을 인용하며 ‘벽 너머에 바다가 있다는데 내가 한번 가볼게’ 하며 너스레로 둘러대곤 했다. 그 이유는 상경 후의 생활에 대한 구체적 질문을 피함과 동시에 어쩌면 낭만적으로도 보일 수 있는 대답일뿐더러 그 후의 반응으로는 막연한 응원 외엔 딱히 나에게 할 말이 없으리라는 그 효율성에 있었다.

 하지만 묘연한 것은 저 문장을 들을 때도, 텍스트로 읽을 때도 감흥이 없지만 소리 내어 말해야겠다 하고 의식을 한 다음 혀를 움직일 때면 언제나 그 끝은 감정이 동반되어 한 글자라도 더 내뱉었다가는 울컥함을 숨길 수가 없어 목이나 눈에 힘을 더 주거나 말을 멈추는 수밖에 도리가 없는 것이었다. 그 포인트는 ‘바다’에 있었다. 나는 그 만화에서 자유로 대유되는 바다에 나의 어떤 것을 함부로 얹어 공진하고 있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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