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도에 육박하는 무더위 속을 걸으며
24년 8월의 어느 날, 이 날의 더위를 단어 몇 개로 표현할 수 있을까...
10여 년 전, 고투어와 심하게 다투고 며칠 서먹했던 후에 왔던 용문사도 그렇게 더웠었다. 숨 막히는 서먹함과 더위.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지금, 우리 부부는 서로에게 가장 편안한 존재가 되었다. 10년이라는 세월이 지나며 많은 게 변했다. 그때 바글바글하고 정돈되어 있지 않았던 용문산 계곡도 정갈하게 탈바꿈되어 있다.
근처 카페에서 든든하게 피자까지 먹은 우리에게 한 시간 정도 걷는 건 우스웠지만 문제는 더위다. 찜통 속, 어항 속, 뭐 그런 말이 어울리는 습도. 다음 날 뉴스에 보니 이 날, 옥천이 순간 40도까지 올랐다는데, 세상에나, 우리가 그 안에 있었다!
오후 해가 질 준비를 할 때쯤 용문산에 도착해 주차할 곳은 충분히 많았다. 차에서 내리자마자부터 이미 땀이 비 오듯 쏟아진다. 벌써부터 힘듦은 웃음으로 승화시켜야 옳지. 입구에 있는 이 동상을 보곤 '용문이'라 이름 지어줬다. "그럼 저쪽 아이는?" 아... 대충 지었는데 눈치 없이 물어보는 고투어씨. 그렇담 뭐, 용순이?
분명 습도가 99% 일 것이다. 그러니 나는 용문사까지 오르지는 못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도를 들여다보던 고투어, "음... 가는데 30분, 오는데 30분이네. 왕복 1시간." 응, 나도 보여. 하지만 나는 못 갈 거 같아라고 생각하며 대답해 본다. "30분만 다녀오자!"
인생은 늘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 내가 어디로 어떻게 갈지 행로를 아는 사람은 없지 않은가. 이 무더위 속에서 그 길을 뚜벅뚜벅 올라 정상에 우뚝 서서 천백 년이나 된 나무와 함께 사진을 찍고 있을 줄이야...
그래도 가는 길 내내 한쪽으로는 인공적으로 만든 시원한 물길이, 다른 한쪽에는 계곡이 흐른다. 어떤 지점에 서면 서늘한 듯한 바람 한 점이 휘릭 불었다가 다시 습기 꽉 찬 공기로 바뀐다. 인공물길에는 더위에 지친 사람들이 발을 담근 채 걸어간다. 아. 우리도 운동화만 아니면 시원하게 발이라도 담가볼 텐데...
그렇게 30분을 꼬박 올랐다. 길은 평탄했지만 조금씩 시나브로 오르막이다. "아우, 더워, 나 이제 더 이상 못 가!" 할 때쯤 짠하고 모습을 보이는 은행나무. 10년 전 모습 그대로 일 텐데, 또다시 경이롭다. 저렇게나 컸었나? 저렇게나 빽빽했었나? 사람도 나이가 들면 머리카락이 듬성듬성 빠지고 나이 든 태가 나는데, 1100년이나 살아내셨다는 이 나무는 젊은 은행나무들보다 어찌 더 빽빽하시다. 이 잎사귀들이 다 노랗게 변하면 얼마나 근사할까.
사진을 요리죠리 찍어봤지만 한 화면에 나무를 다 담기는 쉽지 않다. 높이가 42 미터, 우리나라에 있는 은행나무 중 가장 높고 가장 나이가 많다고 한다. 42 미터면 얼마나 높은가 싶어 찾아보니 아파트로 치면 17층 정도의 높이란다. 와... 뿌리 부분만 둘레가 15미터. 나이가 무려 1100살 이상으로 추정된다고 하니, 인천대공원 앞에서 만났던 800살 추정 장수동 은행나무보다 한참 큰 형님이시다. 더 놀라운 건, 이렇게 나이가 많으신데도 활발한 생산 활동 중이시라는 거. 해마다 350kg 정도의 은행이 수확되고 있단다. 대박이다.
압도적인 크기만큼 전설도 화려하다. 여러 전설 중, 무려 신라의 의상대사님이 들고 다니시던 지팡이를 턱 꽂았더니 지금의 이 은행나무가 되었다는 멋진 전설도 있다. 가장 기가 막힌 건 이거다. 나라에 큰일이 있을 때 소리를 내어 알려주었단다. 고종 황제가 돌아가신 날엔 가지가 하나 뚝 부러졌단다. 양평의병을 따라 올라온 일본군이 용문사에 불을 질렀을 때도 이 은행나무만 타지 않았다고 하니. 신성체 그 자체다!!
그러니 이렇게 신성한 은행나무에 소원을 빌면 이루어 주시겠지. 은행나무 주변 펜스에는 사람들의 소원을 가득 담아 적은 종이 은행나무들이 매달려 있다. 이런데 가면 소원이 뭔지 훔쳐보는 재미가 있어 꼭 시간과 공을 들여 하나씩 살펴보는데, 그 와중에 크게 눈에 띈 하나.
세상에나 꼬맹이 지우야... 엄마아빠 말을 잘 듣는 건 디폴트 값이란다. 여기에 쓸 만큼 그렇게 엄청나게 큰 소원이 아니야. 그리고 이렇게까지 공언하잖아? 평생을 엄빠의 노예로 살아야 할지도 몰라, 이 글을 쓰고 있는 이 이지우처럼 말이야. 그러니 꼬마 지우야! 제발 너의 인생을 살렴. 엄빠의 인생 말고!! 카피카피 룸룸 모르니? 소원은 하나야. 너의 소원을 빌어!
그렇게 남들 소원도 구경하고, 우리 사진도 찍고 경내를 돌아다니며 구경도 했더니 옷이 흠뻑 젖어버렸다. 속옷은 말할 것도 없고, 몸에 굴곡진 곳마다 땀이 흘러내린다. 뭐 어쩌겠는가, 그냥 웃지. 이런 거 다 추억이야. 웃자, 사진을 찍자! 신이 나자! 하며 은행나무 옆에서 충분한 시간을 함께 보냈다. 우리 부부가 제일 좋아하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가까이 가서 잎사귀도 만지고 자세히 들여다보기도 한다. 1100년이나 사셨으면 인간의 말정도는 들리시지 않을까 싶어 한 마디씩 건네보기도 한다. 이렇게 많은 잎사귀의 끄트머리까지도 신선한 초록이라니. 자연과 생명의 경이로움이다. 은행도 이미 빼곡하게 알알이 맺혀있다. 아직은 초록이지만 잠깐만 찬바람이 불기 시작해도 곧 노랗게 익을 것이다. 대체 왜 우리는 이 은행나무 명소에, 가을 명소에, 이 더운 여름에만 두 번 온 걸까. 땀이 너무 많이 흘러 옷은 다 젖고, 머리는 이마에 딱 붙은 이 계절에.
"다음엔 가을에 오자."
"안 돼."
"왜?"
"사람 많아."
"아.... "
그래도 다음엔 노랗게 물들어 멋져진 가을 은행나무를 꼭 보고 싶다.
10년은 또 지나야 올 수 있는 거겠지...
여행 Tip.
계곡에 자리 잡고 놀 생각이 있다면, 꼭 위로 위로 가장 위로 올라가시길.
아무리 봐도 공중화장실이 없다는 게 조금 찝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