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겨울을 지나온 방식
"패스 패스! 너 차지 말라니까! 내가 찰게! "
나는 운동은 좋아했지만 애석하게도 구기종목에는 재능이 없었다. 아쉬운 정도를 넘어 애석하다고까지 표현하는 이유는 구기종목이 남학생들 관계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축구나 농구를 잘하는 녀석은 자연스레 인기가 높아지는 반면 실력이 형편없는 녀석은 괜스레 친구들 사이에서 목소리가 작아지기 마련이다. 구기 종목 실력이 인기와 교우 관계를 재는 척도라고도 할 수 있다.
점심시간이 되면 밥은 뒷전으로 두고 친구들과 운동장으로 달려 나갔다. 무리 속에서 키도 크고 농구도 잘하는 녀석 두 명이 대표로 가위바위보를 하고, 이긴 사람이 우선 선택권을 가져갔다. 즉, 실력이 좋을수록 먼저 뽑히는 방식인데 드래프트의 반대 방식이라고나 할까. 가위바위보 시작과 동시에 긴장감이 도는데 무리 중 한 명 한 명 선택될 때마다 긴장감은 더욱 고조된다. 교우 관계는 문제 없었지만 내 실력이 부족해서 대개 후반에 선택되는 편이었다. 그런데 가장 마지막에 선택되지 않았다는 안도감도 잠깐, 은근히 자존심이 상하는 것이었다. 가위바위보 매 라운드마다 피어오르는 기대와 차가운 거절.
작은 농구 경기에서 선택받지 못하는 것도 자존심이 상할진대. 첫 번째 퇴사 후 수많은 회사의 거절을 겪고 나서 마음이 몇 차례 심하게 무너졌었다. 며칠을 방에 불도 켜지 않고 씻지도 않은 채 말없이 침대에 누워만 있었다. 안 그래도 우울한데 우울한 음악을 듣다 나도 모르게 눈물 한 방울이 찔끔 흐르기도 했다. 이제는 100세 인생이라는데 젊은 날 취업 안된다고 이렇게 힘겨워하는 내 모습이 나약해 보여 자존심은 더욱 낮아졌다. 그렇게 어두운 감정의 늪에 깊이 빠져들었다.
약 일 년이 흘러 재취업에 성공했지만 예기치 않은 두 번째 퇴사를 맞았다. 하지만 작년처럼 살고 싶지 않았다. 불경기, 경색된 고용시장과 같이 나를 둘러싼 상황은 내가 어찌할 수 없으나 내 마음만큼은 나의 것이니 내가 선택하기로 했다. 상황도 억울한데 상황이 나를 삼켜버리는 것만큼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즐겁게 살기로 선택했다.
바쁘게 약속과 일정을 잡았다. 옛 직장 동기들과의 술 한 잔. 간간히 연락만 주고받았던 오랜 친구와의 밥 한 끼. 링크드인에서 유명한 인플루언서와의 커피챗. 그리고 매년 마지막 일주일은 제주도에서 보냈던 기억이 떠올라 철새처럼 다시 제주로 향했다. 겨울 바다는 여전히 시퍼렇고 겨울 바람도 여전히 매서웠다. 매년 한 해를 치열하게 살다가 찾아가면 일주일을 포근히 안아주었던, 그 품으로 다시 돌아가 참 행복했다. 돌아와서는 엄마와 듀엣 필라테스를 등록했다. 겨울 내내 서로의 건강과 마음을 챙기며 특별한 추억을 쌓은 소중한 시간이었다.
비록 상황은 나를 호되게 흔들었지만 나는 즐거운 사람이었다. 내가 그렇게 살기로 선택했으니까.
+ 농구 경기 전 가위바위보로 편을 고를 때 나는 대개 후반부에 선택되었는데 종종 예외가 있었다. XX가 가위바위보를 하는 날이면 그 녀석은 항상 나를 먼저 선택했다. 그 녀석은 지금도 나의 가장 좋은 친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