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사 나부랭이라고?
"고양이를 왜 키우게 됐어?"
강아지 키우는 지인이 집에 놀러 와 멀뚱거리는 고양이를 보고 처음 했던 말이다. 똥꼬 발랄한 강아지만 보다가 전혀 딴판인 이 생명체가 당혹스러웠던 건지, 궁금증이 일었던 건지 그녀는 내게 물었다.
'음, 고양이는 참 오묘한데 말이지. 그러니까 이 생명체는 매력이 넘치는데 말이야.'
키워본 자만 알 수 있는 그들의 매력을 고양이 없는 자가 어찌 헤아릴 수 있겠는가. 그 뜻이 충분히 닿지 않아 아쉬울 뿐이었다. 그러고 보면 강아지 보호자는 보통 견주로 불리는 데 비해 고양이 보호자는 집사로 불리는 게 일반적이다. 고양이를 키우는 일본인은 하인으로, 독일인은 캔따개로, 중국인은 똥 치우는 관직으로 불린다고 하니 각 나라의 사정도 별반 다르지 않아 보였다. 이쯤 되면 고양이가 배은망덕하게 여겨질 법도 한데 이런 불효막심한 고양이를 보고만 있어도 실실 웃음이 나오니 내 웃음주머니에 이상이 생긴 걸까?
냉탕과 온탕을 오가는 고양이의 온도
"루이야, 베리야, 엄마 왔다."
외출하고 집에 돌아오면 어느 날은 두 고양이가 현관까지 나와 먼저 기다리고 있다가 '어디 갔다가 이제 왔어?'라며 귀여운 핀잔을 하듯 정신없이 내 주위를 빙빙 맴돈다. 또 어느 날은 나갔다 온 사람의 인사를 뻘쭘하게 만들며 생판 처음 보는 사람마냥 있던 자리에서 끔뻑끔뻑 쳐다만 본다. '잘 다녀왔으면 됐어. 들어와. 집사야.'라고 무심하게 말하듯이.
냉탕과 온탕을 오가는 고양이 온도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이 생명체는 도대체 나를 어떻게 생각하길래? 진짜 밥이나 주고 똥이나 치우는 하인으로 여기는 건가? 서운한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오려 할 때 고양이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그리 섭섭할 일도 아니다. 고양이는 대개 사람을 덩치 큰 고양이로 생각한다. 자신을 잘 돌봐주는 사람을 엄마 고양이로, 잘 놀아주는 사람은 형제 고양이로. 그들에게 있어서 사람은 수직관계가 아닌 수평관계인 것이다.
우리 아이들을 생각하니 바로 이해가 갔다. 어느 날은 온몸으로 고마움을 표현하는가 하면 어느 날은 온몸으로 심통을 표현하는 사람 아이들. 엄마이기에 가능했던 이런 행동들을 고양이 아이들도 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오히려 고맙기까지 했다.
'너희들이 나를 진짜 고양이 엄마로 여기고 있는 거구나.'
고양이식 화법을 배워봐?!
좋은 건 좋다고, 싫은 건 싫다고 감정을 감추지 않고 표현하는 고양이식 화법은 때로는 복잡 미묘하게 얽힌 인간관계를 단순하고도 명쾌하게 해준다. 상대를 배려하기 위해 했던 행동이 오히려 나를 힘에 부치게 하기도 하며, 때론 오해가 생겨 관계를 되돌리기 어렵게 만들기도 하기 때문이다. 상대에게 내 감정을 솔직하게 전달하는 건 어쩌면 나를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건 아닐까? 억지 배려로 서로의 마음이 상하는 것보다 솔직한 감정 전달로 상대를 알아가는 게 어쩌면 진짜 배려의 길로 갈 수 있는 방법은 아닐는지.
한 주가 시작되는 월요일 아침, 흐드러진 햇살이 창가를 서성이다 고양이 위에 내려앉았다. 따스한 햇살 속에 나른한 꿈을 걷고 있는 고양이들.
"루이야, 베리야, 밥 먹자."
여전히 꿈쩍도 하지 않는 고양이들. 저들의 꿈나라는 어떤 곳이길래 밥도 마다하는 것일까?
갓 내린 커피가 알싸하게 코끝을 머물다가 입술에 닿았다. 고양이 위에 앉아 있던 햇살은 집 안 구석구석을 밝히며 돌아다녔고 나는 이들의 꿈은 어떤 모습일지 상상해 봤다.
달콤한 나라?
사뿐사뿐 구름 위를 걷는 나라?
아니면 따뜻한 무릎 위에서
세상 걱정 없는 나라?
커피 한 모금을 기웃거리며,
그가 깨어나길 기다리며,
나도 그 나라를 헤아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