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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숫자 막대의 비밀

뭣에 쓰는 물건인고?


테이블마다 빨간 막대가 투명한 용기에 담겨있다.

'뭣에 쓰는 물건인고?'

막대를 꺼내 이리저리 살펴보니 5개의 막대에 모두 11이라는 숫자가 쓰여 있다.

이리저리 살펴봐도 설명글이 없어 (내가 못 찾은 것일 확률이 크다^^) 정확한 용도를 알 수 없었다.


주변에서 향긋한 냄새가 번져온다. 빨간 막대 호기심은 이내 사그르르 접어든다.

이곳은 힐튼 호텔의 조식당! 식욕을 돋우는 냄새의 재촉에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김치의 사물놀이


조식코너를 둘러보니 익숙한 부채 모양이 눈에 들어온다. 한식 코너이다. 


반가운 김치가 보이자 설레는 마음이 들었지만, 이전에 다른 지역의 힐튼 호텔 조식당에서 한식을 먹고 실망했던 경험이 있어 마음을 진정시켰다.  


당시 신라면과 떡볶이를 제공했었는데...

물이 너무 많이 들어 신라면은 그만의 정체성을 잃었고, 

떡볶이는 고추장 외에 다른 양념은 첨가되지 않은 듯한 무늬만 떡볶이여서 아쉬웠던 적이 있었다.


'타국에서 완전한 한국맛을 찾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겠지...

스스로 마음을 위로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담담하게 한식 코너에서 가져온 김치를 맛보았다. 


 '헙! 이 맛은...!?'


갑자기 머릿속에서 징소리가 들려왔다. 

마음속에서 북과 장구가 덩덩쿵덕 신나게 울려 퍼졌다.

김치의 매운맛, 시큼함, 감칠맛이 모두 덩실덩실 탈춤을 추며 입맛과 신명을 돋운다.  

김치 맛에 깜짝 놀란 눈동자는 꽹과리 소리에 맞춰 뱅글뱅글 흥겹게 상모를 돌리기 시작한다. 

한바탕 김치의 종합예술공연이 벌어졌다.

한식 코너 
한식 코너에 있던 김치



돌솥비빔밥


돌솥비빔밥 코너도 보인다. 코너 옆에 돌솥비빔밥 사진이 있는 것을 보니 이곳에서 주문하는 것 같았다. 

'자, 돌솥비빔밥을 주문해 볼까?'


초롱초롱한(이라 적고 맑눈광*0*이라 읽는다) 눈빛으로 돌솥비빔밥 코너 직원분과 아이컨택을 한다.

나를 쳐다보면 그때부터 마임을 시전 한다.


우선 손가락으로 를 가리킨다.  

(내가 하고 싶었던 말: 내게)


그다음 돌솥비빔밥 사진을 가리킨다.  

(내가 하고 싶었던 말: 돌솥비빔밥을)


빙그레 웃으며 손가락으로 숫자 1을 보여드린다.  

(내가 하고 싶었던 말: 한 그릇 주세요)


뿌듯하게 마임을 끝내고 직원분을 바라보았다. 

알았다고 하실 줄 알았는데 중국어로 길게 무언가를 말씀하신다. 


"~$#%@~빨간색(红色)~&@#*~~"

"네??"

"*&^$%^@!$%^%$~빨간색 (红色)@#$$^*@#*!@&^%!@~"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은 빨간색 하나뿐!

'빨간색, 빨간색...? 아! 혹시 테이블 위에 있던 그 빨간 막대!?'


내가 앉았던 테이블로 돌아와 빨간 막대를 얼른 꺼내 들었다. 빨간색을 외치셨던 직원분께 가져다 드렸다.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시며 손으로 OK사인을 하신다.

"하오~(OK 好)"


중국에 살면서 중국어 습득 속도보다, 

중국어를 듣고 무슨 내용인지 대~~충 파악하는 눈치 속도가 더 빠르게 늘고 있다.


숫자 막대를 드리며 돌솥비빔밥을 주문



빨간 막대의 비밀


빨간 막대의 비밀이 풀렸다. 이 곳의 메뉴 주문 시스템이었던 것이다.

이것을 들고 요리 코너로 가서 원하는 메뉴를 주문하면 즉석에서 조리가 시작한 후, 각 숫자 막대에 써진 테이블 번호로 서빙이 된다. 오랫동안 중국에 살면서 한식에 대한 그리움이 컸기에, 우연히 만나게 된 빨간 막대가 마치 소원을 말하면 들어주는 도깨비방망처럼 느껴졌다. 



비빔밥 나와라, 뚝딱! 


지글지글 맛깔난 소리와 함께 돌솥비빔밥이 테이블로 왔다.

슥슥 비벼 먹어보니 한국의 그 돌솥비빔밥 맛이다.

심지어 웬만큼 맛있는 돌솥비빔밥 식당보다 맛있다.

바삭바삭 누룽지를 씹으며 나지막이 환호성을 질렀다.

'와~ 바로 이 맛 아닙니꽈!!'

돌솥비빔밥



신라면 나와라, 뚝딱! 


빨간 막대를 들고 다시 한식 코너로 갔다. 이번에는 신라면을 주문했다.

10여분 후, 김이 모락모락 나는 신라면이 테이블로 배달되었다. 

국물을 한 입 마시자, 진하고 얼큰한 맛이 혀끝을 맴돌고 한국의 풍경들이 머릿속 파노라마처럼 지나갔다.

신라면



사랑해요, K-푸드


한식보다 더 한식 같았던 음식을 먹고, 주방장님이 누구실까 궁금했다.

조식당 주방을 향해

"김 ~!"라고 부르면..

주방에서 한국인 셰프가 젖은 손을 앞치마에 툭툭 닦으시며 

"예~ 갑니다~~"

하고 나오실 것만 같았다. 



한국 맛이 진하게 들어간 비빔밥 덕분에 

한국에 돌아가면 먹을 먹방리스트에서 '비빔밥'의 진하기가 옅어졌다. 

신라면과 김치의 행복한 조합 덕분에

한국 음식에 대한 그리움이 잠시나마 희미해졌다.




- 번외 편 -

그 밖에도 이곳에서 김치찌개와 미역국도 맛볼 수 있었다.

미역국





더블트리 바이 힐튼 광저우 사이언스 시티
Double Tree by Hilton Hotel Guangzhou-Science City
广州汇华希尔顿逸林酒店





*맑눈광: 맑은 눈의 광인이라는 뜻으로, 맑은 눈을 가진 열혈 속성의 캐릭터들이 에너지가 넘쳐 흐르는 모습을 표현한 밈의 일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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