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류 한 장으로 부부가 된 우리는
조심스럽고 서툴렀지만, 진짜 함께하는 삶을 시작했다.
작은 원룸 신혼집에서
두 개뿐인 머그컵과 반찬 몇 가지,
밤마다 나란히 보는 예능 하나로도
우린 충분히 따뜻했다.
나는 재택으로 일했고,
남편도 매일같이 일을 하며 생활비를 보탰다.
넉넉하진 않았지만,
서로의 하루를 들어주는 여유,
그게 우리에겐 가장 큰 위로였다.
그렇게 평화로운 신혼 생활이 이어지던 어느 날,
남편이 조용히 말을 꺼냈다.
“나 일 그만두고, 사업 한번 해보고 싶어.”
놀라지 않았다.
왜냐하면, 나도 그렇게 시작했었으니까.
어느 날 그리고 갑자기.
엄마 가게가 망할 뻔 했을 때
리모델링부터 매출 관리까지,
하나하나 직접 부딪히며 배웠던 시간들.
그래서 그의 말이 무모하게만 들리진 않았다.
“그래. 해봐.
내가 도와줄 수 있을 거야.”
그 말에 남편은 오랜만에 환하게 웃었다.
그날부터 우리는
가계부 대신 사업계획서를 펼치고,
데이트 대신 자금 계획을 짰다.
나는 자금 확보부터 마케팅까지
내가 할 수 있는 걸 꺼내놓았고,
남편은 아이디어를 정리하며 밤을 지새우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이 말했다.
“우리, 제주도 다녀올까?”
나는 순간 얼굴이 굳었다.
“제주...? 왜 하필?”
남편은 눈을 피하지 않고 말했다.
“너, 제주 싫어하잖아.
그래서 이번엔, 좋은 기억으로 덮어주고 싶어.”
나는 말없이 그를 바라봤다.
제주도.
그곳은 나에게 죽고 싶을 만큼 힘들었던 기억이 남아 있는 곳이었다.
엄마 사업장에서 무급으로 일했고,
모아둔 돈은 전부 가게 리모델링에 들어갔고,
하루하루가 지옥 같았던 곳.
비 오는 날이면
뒷문에 주저앉아 몰래 울던 날도 있었고,
낮에는 가게에서 일하고
밤에는 학교 과제를 하느라
3일 내리 밤을 새운 적도 있었다.
지쳐서 바닥에 그대로 누운 채
눈만 깜빡이며 천장을 바라보던 날들이
아직도 선명하다.
그 기억들이
제주라는 단어에 그대로 묶여 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니... 다시 가고 싶지 않아.”
남편은 조용히 내 손을 잡았다.
“그래서... 이번엔 같이 가서,
좋은 기억으로 다시 만들어보자는 거야.
퇴직금 들어왔으니까
사업 시작 전에, 잠깐 쉬고 오자."
그렇게 우리는,
퇴직금을 몽땅 들고 제주로 향했다.
비행기가 제주공항에 도착했을 때,
나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똑같은 바다,
여전히 똑같은 하늘.
하지만 이번에는 조금 다른 기분이었다.
남편이 내 손을 꼭 잡았다.
“이번에는 네가 하고 싶은 거 다 해.”
나는 눈이 동그래져 대답했다.
“뭐든?”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제주가 더 이상 네게 나쁜 기억이 아니게 만들 거야.”
우리는 바닷가를 걸었고,
예쁜 카페에서 시간을 보냈고,
조용한 숲길을 따라 산책을 했다.
나는 처음으로 제주에서
여유를 느꼈다.
이전까지의 제주가
고된 노동과 지쳐 쓰러지는 기억뿐이었다면,
이제는
바람이 부는 바닷가에서
웃으며 사진을 찍던 기억이 생겼고,
따뜻한 차를 마시며
조용히 창밖을 바라봤던 순간이 생겼다.
제주가,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
여행이 끝나갈 무렵,
나는 남편에게 말했다.
“솔직히, 처음엔 제주 다시 오는 거 정말 싫었어.”
남편이 조용히 내 손을 잡았다.
“그래서 좋은 기억으로 덮어주고 싶었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
그는 빙긋 웃으며
내 머리를 조용히 쓰다듬었다.
“그럼 됐어.”
비행기를 타고 서울로 돌아가는 길,
나는 창밖으로 보이는 제주를 바라보았다.
그곳은 여전히 같은 섬이었지만,
이제는 조금은 다른 곳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나는 더 이상 제주가
싫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