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서 다녀오니
예전 기억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공항에서 내려 처음 맡은 그 바람,
차창 밖으로 지나던 낯익은 풍경들,
그리고 밤이 되면 어김없이 떠오르던
그 시절의 나.
엄마의 가게가
망하기 직전이었다.
예약은 끊기고,
직원은 떠났고,
후기에는 별 하나짜리 클레임이 쌓여 있었다.
대출은 이미 한도를 넘었고,
“경매에 넘어갈 수도 있다”는 말이
더는 위협처럼 들리지 않았다.
그냥 곧 닥칠 현실 같았다.
나는 급하게 투입되었다.
잠깐 도와주려 했지만
그 ‘잠깐’은
아무도 끝내주지 않았다.
예약 관리, 손님 응대, 클레임 처리, CS,청소
후기 응답, 블로그,마케팅, 홈페이지 제작.
직원이 없었기에
모든 걸 혼자 감당했다.
밤엔 블로그를 쓰고,마케팅 공부를하고
새벽엔 시트 상태를 확인하고,
낮에는 멀쩡한 얼굴로 웃으며 손님을 맞았다.
눈물은 주로
수건 정리하다가 쏟아졌다.
리모델링도 결국
내 돈으로, 내 손으로 했다.
벽지를 뜯고 페인트를 칠하고,
가구를 주문해 조립하고,
조명과 침구, 분위기를 바꿨다.
운영 매뉴얼도 만들었다.
예약 흐름, 후기 관리, 응대 방식까지
모든 걸 체계로 정리했다.
그리고...
무급이었다.
가족이니까.
엄마 일이니까.
그 말 한마디에
내 노동의 가치는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외주도 병행했다.
그 와중에
학교도 다녔다.
주전공 하나, 복수전공 하나, 부전공 두 개.
총 네 개의 전공.
과제, 팀플, 발표
단 하나도 놓치지 않았다.
나는 삼일에 한 번 기절하듯 잤다.
삶에서 내가, 꿈이 점점 사라지고 있는 것도 몰랐다.
직원이 생기기 시작했다.
인스타 관리를 해주는 친구가 생겼고,
마음이 잘 맞는 사람과 일하는 건
잠깐의 숨 같은 위안이었다.
하지만 대부분은 내 또래의 남자였고,
누군가는 고백을 했고,
누군가는 농담처럼
불쾌하고,
불편한 말을 흘렸다.
존중은 없었고,
책임은 전부 내 몫이었다.
그래도 버텼다.
그렇게 가게는 결국, 대박이 났다.
운영은 안정됐고,
시스템은 정리됐고,
내가 없어도 돌아가는 구조를 만들었다.
그리고 나는,
그 곳에서 사라졌다.
코로나 비대면 수업이 끝나고,
나는 서울로 올라왔다.
하지만,
“이제 좀 숨 쉬겠다”
싶었던 그 서울에서
완전히 무너졌다.
모든 걸 해냈고,
모든 걸 이뤘는데,
꿈도 희망도 잃은 채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있었고,
내 꿈도,
방향도 모두 잃은 상태였다.
'갓ㅇㅇ'으로 불릴정도로
전공을 잘하던 내가,
감도 잃고,
전공조차 다시 손댈 수 없는 상태가 되어 있었다.
숨도 못 쉴 정도로 바쁘지 않고서야
알아챈 나의 상태였다.
자살 시도.
나는 ‘기능’만 남아 있던 사람이었다.
움직이되 살아 있지 않았고,
버티되 존재하지 않았다.
어찌어찌 살아남았고,
그렇게 휴학을 했다.
그 시기,
그가 내 삶에 들어왔다.
지금의 남편.
그땐 연인이었다.
그 사람은
내가 말하지 않아도
내가 어떤 상태인지
알아차리는 사람이었다.
그와 함께하면서
조금씩
숨이 돌아왔다.
그 덕분에 나는 복학을 할 수 있었다.
재택으로 가게 일도, 외주도 다시 시작했다.
이번엔 월급을 받았다.
하지만 사는 방식은 여전했다.
해야 할 일,
답장할 메시지,
끝나지 않는 작업들...
어느 날 밤.
나는 노트북 두 대를 붙잡고
가게 마케팅과 외주 피드백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때 그가
‘탁’ 하고 노트북을 닫았다.
“그만해.
너 지금 울면서 일하고 있어.”
나는
정말 울고 있었다.
“넌 쉬는 법을 몰라.
이러다 진짜 끝까지 무너져.”
나는 중얼거렸다.
“나 지금 4학년 2학기야.
이제 다 왔는데 지금 멈추면, 나는 뭐가 돼?”
그는 조용히 말했다.
“끝까지 다 해내고 나면, 넌 정말 행복할 수 있어?”
그렇게 학교를 자퇴했다.
4학년 2학기.
거의 끝이 보이는 순간,
나는
살기 위해 학업을 멈췄다.
그리고 일도 모두 멈췄다.
나를 멈춰준 사람은
내가아닌,
나를 알아봐 준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