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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안 Mar 06. 2023

비지 촌감(寸感)

                                       


   덤이지만 알짜배기다. 두부를 만들다 남은 비지는 덤으로 생겨나긴 해도 그만의 존재감이 따로 있다. 고소하고 담백한 비지장은 겨우내 반찬 걱정을 덜어준다. 생비지로 찌개를 끓이는 것도 좋지만 발효를 거친 한결 더 구수해진 비지장이 단연 으뜸이다. 비지의 매력은 수수한 맛이다. 요란한 양념으로 맛을 내기보다 있는 그대로를 잘 살릴 때 더 깊은 향이 난다. 

   콩 타작 끝난 늦가을 뜨끈한 구들장 아랫목에 비지 띄우던 냄새는 고향집의 아련한 향기로 스며들었다. 가끔 향수 찾아 헤매는 발길처럼 시장을 떠돌다 둥글둥글 빚어놓은 비지뭉치를 발견하면 괜히 반갑다. 타지 물 먹은 지 오래지만 혀끝은 그대로이다. 고민 끝에 출처를 알 리 없는 비지를 사들고 돌아오는 내내 오랜 유년의 정감을 떠올린다. 아무렴 인이 박인 우리 집 비지만 못하지만 어차피 객지의 삶은 애정결핍이다. 

   비지 한 덩이에 추억도 따라온다. 집에서 두부를 만드는 날 마당은 훈기로 가득 찼다.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콩물에 두부를 기다리는 설렘이 덩달아 복닥댄다. 간수를 치며 긴 주걱으로 휘젓는 어머니는 몰래 요술이라도 부리는 것 같다. 한껏 들뜬 내 마음처럼 몽글몽글 엉기며 피어나는 순두부가 신기하다. 아버지가 손수 만드신 네모난 틀에서는 소박한 일상의 행복이 탱글탱글 다져진다. 따끈한 두부가 기다려지는 나와 달리 비지 띄울 준비에 부산하신 부모님의 모습에 또 다른 기대감이 묻어난다. 

   비지장은 산골 겨울밥상의 단골이었다. 가마솥 눈물을 행주로 훔치며 솥뚜껑 살짝 밀어 젖혀 비지그릇을 넣던 어머니, 뜸 들이며 밴 숭늉 향에 구수함까지 더해진 비지장은 더욱 입맛을 돋우었다. 순한 그 모양만큼이나 덥히는 풍경조차도 순박하고 정겹다. 그 시절 생각에 비지그릇을 김 오르는 밥솥에 슬쩍 넣어둔다. 해거름 저녁 하염없이 밀려오는 서글픔을 녹여주던 아궁이불 생각만으로도 세월에 무뎌진 그리움 하나 따뜻하게 뜸이 든다.

   비지, 그거 참 비지땀 나는 운명이다. 펄펄 끓는 콩물을 자루에 담아 홍두깨로 주리를 틀어 짜고서야 비로소 비지라는 실체가 도드라진다. 뜨거운 콩물이 주룩주룩 흘러내리며 두부와 비지의 몫이 나누어진다. 어쩌면 비지는 남는 것이 아니라 드러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비지땀에 흠뻑 젖은 뒤틀린 자루의 모습이 산고에 몸부림치는 산모 같다. 땀이 송송 맺힌 자루에는 퍼석한 엿기름가루처럼 건더기만 남는다. 

   아직 갈 길이 멀다. 비지는 이제 구들장으로 향한다. 진 빠진 그 푸석푸석한 몸으로 허드레담요 속에 가부좌를 틀고 앉는다. 약간 껄끄러운 식감과 남은 비릿함을 떨치기 위해 숨통 조이는 더위를 참으며 또 한 번의 땀을 뺀다. 온 방에 진동하던 쿰쿰한 고행의 냄새가 서서히 토속적인 비지장으로 바뀌어간다. 비지 홀로 또 한 번의 해산을 한다. 

   이제 더 이상 비지는 두부를 만들다 얻은 덤이 아니다. 발효음식으로 새롭게 태어난 비지는 그 어떤 것으로도 흉내 낼 수 없는 특유의 맛과 향을 얻었다. 한 번 깊어진 맛은 어떤 식재료와 어울려도 자기만의 향을 잃지 않는다. 비지장이 갖가지 양념으로 술수를 부린 찬들에 결코 밀리지 않는 것은 한 사흘 잘 견딘 발효의 내공이다. 

   어쩌면 인생도 그처럼 끊임없이 거듭나는 여정인 것 같다. 콩물을 짜낸 건더기가 숙성의 시간을 거쳐 맛있는 비지가 되듯 숱한 시행착오가 여물어 삶의 연륜이 된다. 여리디 여린 애송이가 사회의 한 존재로 자립하기까지, 철없는 한 남자 한 여자가 듬직한 가장과 강한 어머니가 되기까지 삐질삐질 진땀나는 시간을 지나야 한다. 자식뒷바라지에 그야말로 비지땀 나는 부모의 일생, 그렇게들 속 튼실한 어른이 되고 삶은 한층 맛들어간다.

   평생 비지 같이 살아도 세월은 야속하다. 콩물 담은 자루쯤이야 거뜬했던 아버지의 힘을 서서히 갉아먹더니 끝내는 그 아버지를 앗아갔다. 먼지에 슬어가는 두부 틀을 볼 때마다 힘없는 노구로도 그 성가신 일들을 했던 어머니 아버지의 애틋한 마음이 전해온다. 시골집에 힘쓸 수 있는 자식 여럿 모이는 날에도 손두부 한 번 만들어 볼 엄두를 내지 않는다. 무뚝뚝한 아버지가 자식을 생각하는 마음은 그런 것들에 올올이 숨어있었던가 싶다. 

   삶의 메시지는 행간에 흐른다. 사람은 세월 따라 겪을 것은 겪어봐야 그만큼 철이 드는가 보다. 까칠해진 입맛에는 비지가 아닌 오히려 두부가 덤이라는 아버지의 농 같은 말씀이 이제쯤은 수긍이 간다. 그 아버지가 비지처럼 땀 흘리고 사셨다는 것도, 마지막 한 방울까지 짜내는 심정으로 하나라도 더 주고 싶어 안달이셨다는 것도 이제쯤은 알 것 같다. 품 안의 자식 하나씩 떠나보낼 때마다 부모님은 해산의 아픔을 삭이셨으리. 

   산다는 것은 산통의 연속이다. 사는 동안 제 자리에서 제 나잇값을 하는 사람이 되는 일이란 끊임없는 자기숙성이 필요한 일이다. 어쩐 일인지 내 삶에서는 아직 설익은 콩처럼 비릿한 냄새가 나는 것 같다. 불혹이 아닌 여전히 삶에 서툰 그냥 사십대로 살아가는 것은 고갯마루를 제대로 넘어오지 못한 때문인가 주섬주섬 돌아보게 된다. 

   비지는 사람의 속도 숙성시키는 걸까. 비지 한 덩이에 참 덤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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