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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안 Mar 06. 2023

홍시

     

   촛불잔치다. 가을 햇살에 제 몸 오롯이 불태운다. 돌덩이처럼 딱딱했던 풋감이 햇살에 녹고 달빛에 젖어 홍시가 된다.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는 세상이라지만 천지의 리듬에 맞춰 영글어간다. 

   홍시를 기다리는 것은 어린 시절 기다림을 알아가는 시간이었다. 여름 태풍에 우박처럼 후드득 떨어진 땡감을 잿물에 담가두면 그 삭은 맛이 단감처럼 먹기 좋았다. 감이 발그레 물들기 시작하면 마음은 더욱 달아오른다. 살짝 말캉해지기 시작할 무렵부터 오며가며 쿡쿡 찔러도 보았다. 타는 내 속과 달리 누런 황금벌판에 눈이 부실 즈음에야 홍시는 창공을 수놓았다. 

   가을철 시장에는 붉은 등처럼 곱게 진열된 홍시가 눈에 자주 띈다. 상품가치 때문에 때깔 좋은 것들만 줄을 섰지만 감나무 그늘에서 떨어진 금 간 홍시를 골라먹는 맛도 재밌다. 지금처럼 군것질거리가 흔하지 않던 시절 홍시는 여름철 오디 같은 것이었다. 한창 먹성 좋던 시절 하루에도 몇 번씩 다람쥐처럼 감나무를 탔다. 

   한 마리 새가 된 것 같았다. 목 좋은 가지에 걸터앉아 지붕 너머 펼쳐진 들판을 멍하니 보는 것도 좋았다. 홍시를 그 자리에서 한입 베어 물면 드높기만 한 가을하늘에 성큼 다가선 듯이 가을을 통째로 삼키는 듯이 기분이 부풀어 올랐다. 홍시는 허기만 채운 것이 아니라 옷자락 곳곳의 감물처럼 추억도 물들이고 영혼도 채웠다.

   고향집 마당 감나무가 이제 제법 고목 티가 난다. 진한 고동빛의 나무껍질이 거북등처럼 두껍다. 풍상을 겪은 곪은 흔적과 제 무게를 견디지 못해 처진 가지가 등 굽은 촌로를 닮았다. 그렇게 흘러왔고 또 흐르는 세월이 해마다 홍시를 빚어낸다. 여름 땡볕과 나뭇가지를 흔들어대는 비바람, 그믐밤의 적막을 견디며 가을볕 아래 홍시가 완성된다. 

   풋감에서 홍시가 되도록 자연이 부여한 시간을 기다리듯 때를 기다릴 줄 아는 것도 삶의 한 과정이다. 땡감의 텁터름한 맛도 지나야하고 될 듯 말듯 애태우는 시간도 넘어가야한다. 한 번쯤은 초개처럼 뭉개진 쉰내 나는 시련도 겪기 마련이다. 젊은 날 떫은맛의 시행착오가 잘 여물어야 때깔 좋은 홍시 같은 연륜이 되는 법이다.

   홍시 맛에도 연륜이 깊어지는 시간이 있다면 겨우내 항아리에서 빚어내는 그것이라고나 할까. 감나무 잎이 단풍이 들면 큰 항아리에 켜켜이 짚을 깔고 홍시를 저장했다. 긴긴 겨울 밤 출출함을 달래기엔 그만한 것이 없었다. 칠흑 같은 뒤뜰 장독대를 비추는 건 부엌 사이로 새어나오는 침침한 백열등이 전부였지만 홍시를 꺼내러 가는 일은 주저하지 않았다.

   큰 양푼에 담아온 홍시를 숟가락으로 으깨어 퍼먹으면 서걱서걱 살얼음 씹히는 소리가 엄동설한 추위를 더했다. 홍시 두어 개에 뜨끈한 구들에 달아오른 볼이 식는다. 스르르 녹는 살얼음 속 달달한 맛이, 산골 겨울의 운치까지 밴 그 홍시 맛이 요즘 시중의 것에 비할까. 

   세상이 바뀌어도 고향들녘 주렁주렁 널려있는 홍시에는 옛 맛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홍시 한입에 추억과 감동이 밀려온다. 자연의 섭리 속에 시나브로 제 명을 다한 깊은 맛이다. 홍시 하나로도 소박하게 정을 나누던 오래전 그때처럼 감나무 가지 하나를 꺾어든다. 실하게 달린 발그레한 감에 시골집의 정취를 그대로 담아간다.

   고향에서 옮겨온 한 자락 가을이 옹골차다. 볕 잘 드는 창가에 걸어둔 감나무 가지가 자꾸 발길을 이끈다. 하루 햇살에 또 얼마나 붉어졌는지 어떤 것이 더 말랑한지 참지 못하고 살짝 찔러본다. 홍시를 기다리는 일이란 예나 지금이나 설레면서도 조바심 나는 일이다. 홍시 앞에서 영락없이 아이가 된다.

   마른 가지를 흔드는 소슬바람에 넌지시 주문을 걸어본다. 때를 기다리는 느긋함을 지니길, 가을빛 흠뻑 머금은 홍시처럼 삶의 심지 환하게 사르기를.

   홍시의 가을이 내 가슴에 깃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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