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향소국과 봄 양귀비
정원은 우리가 기대하지 않은 곳에서
가장 큰 기쁨을 선사한다.
정원에 봄이 왔다. 봄은 정원의 계절이다. 작년, 이사 기념으로 심은 작은 모종들이 자신이 단단히 땅에 뿌리내렸음을 증명하는 계절이다. 겨우내 앙상하던 마당은 연둣빛 새순을 내고, 이윽고 초록의 잎 사이로 꽃들도 피었다. 물론, 잡초도 덩달아 쑥 자라는 계절이 봄. 정원사는 봄이 제일 가는 노동의 계절이지만, 만남의 계절이기도 하다. 정원사는 잡초를 뽑다 구상나무 그늘 아래 수줍게 드러난 보랏빛 작은 꽃을 본다. 이건 내가 심지 않은 꽃인데! 무슨 꽃일까. 아 장미매발톱꽃!
그렇다. 내가 심지 않아도 피어난 어여쁜 네가 있다. 오늘은 정원사와 자연이 공동으로 정원을 가꾸는 이야길 해보려 한다. 정원은 매일 정원사의 손으로 가꾸지만, 계획대로 되진 않는다. 심는 대로 나지 않고, 정성을 기울여도 시들기도 한다. 무심하게 잊어버려도 씩씩하게 살아있는가 하면, 정성을 기울인 만큼 예뻐지기도 한다. 예측할 수 없어 더 사랑스러운 게 정원의 매력이지.
양귀비는 예측하지 못한 순간에 찾아왔다. 처음에는 잡초인 줄 알고 뽑으려다 보니 여느 잎들과 달리 잎이 연한 청록을 띄고 있었다. 처음 정원의 잡초를 베어내던 작년 여름, 발견한 백합을 기억하고 있다. 이 작은 싹은 어떤 놀라움을 안겨줄까? 궁금했다. 그리고 기다렸다. 이윽고 쭉 뻗은 꽃가지 위로 봉오리가 맺히고 강렬한 진한 주황의 꽃이 피었다. 바로 양귀비였다.
양귀비가 피어난 자리는 거실 창가 밑의 하얀 덩굴찔레를 심어둔 곳이었다. 이미 자생하고 있던 분홍색 사랑초와 함께 하양과 분홍의 서정적인 자리라 나름 상상해 둔 곳이다. 그 사이에 빨강도 아니고 진핑크도 아닌 주황의 꽃이라니. 심지어 어디에 어떻게 필지 모른다니. 양귀비는 그렇게 정원의 삶에 홀연히 나타났다.
아, 정원사만의 정원은 아니었을까. 수더분한 정원사의 삶에서 결코 선택하지 않았을 화려한 주황꽃. 양귀비는 봄부터 초여름까지 피고 지고 하면서 정원의 풍경에 활력을 더 했다. 그리고 알려준다. 자연이 주는 의외성에 대해서. 예측할 수 없는 즐거움에 대하여. 주황빛 한두 송이가 정원사의 시선을 빼앗는다. 정원사 인생에서 처음 만나는 다채로움이었다. 준비 없이 만났으니, 더욱더 그 아름다움에 빠져들 수밖에.
정원의 세계에도 반려식물이 있다. 그중 향소국은 오랜 반려식물이다. 10년간 세 번의 정원이 바뀔 때마다 함께 함께 이사했다. 신혼시절, 3,000원짜리 모종이 제법 잘 커서 반으로 나누어 아는 언니에게 나눔 하고 작은 화분에 키웠다. 10층의 전셋집 정원의 작은 화분으로 시작한 정원사의 오랜친구인 향소국은 16층 집으로 이사 가고 나서 큰 화분에 옮기고 나선 양껏 햇빛을 들이마시며 한두 송이 탐스러운 꽃을 피워냈다. 바람도 비도 오지 않은 온실에서 곱게 키운 귀여운 하양의 아름다움. 참 예쁘고 고왔다.
작년, 처음 이사 오면서 향소국을 옮겨 심었다. 원래 노지 월동이 되는 식물이라 가을에 무작정 심었고 그해는 뿌리내리기에 힘을 쏟았다. 향소국은 꽃도 피우지 않고 자신의 정착을 증명하는 한 해를 보냈다. 계속 뿌리내리고 가지를 뻗으며, 본질의 힘을 조금씩 보여줬다. 꽃을 피우는 것도 잊어버리고 열심히 살아냈다. 그리고 1년 뒤 가을, 향소국에 꽃망울이 맺혔다. 풍성해진 가지 끝마다 달린 작은 열매 같은 꽃망울이 이제 곧 진정한 그의 계절임을 예고했다. 날이 서늘해지던 9월 말 한 두 송이 피기 시작하더니 열 송이, 그러다 폭죽이 터지듯 가을 내내 꽃을 피웠다. 12월인 지금도 그 여운의 흔적이 가지 끝마다 있다. 본질의 힘은 땅에 있나 보다. 10년 동안 보지 못했던 뿌리내림의 힘을 비로소 마주했다. 이런 것이 야외 정원의 매력이겠지.
인생을 정원이라 상상해 본다. 이 정원에는 다양한 꽃과 식물, 나무가 있다. 어떤 구역은 무성하고 촘촘히 피어날 것이고 어떤 곳은 미처 손대지 않아 돌과 잡초투성일 수 있다. 황량한 곳이더라도 고요한 순간이 있고, 무성하더라도 번잡한 순간도 있으리라. 마음에 들지 않는 인생의 잡초를 계속 뽑아내려 노력할지라도 정원은 정원사의 마음만큼 완벽해질 수 없다. 그리고 완벽한 정원을 원하지 않음을 깨닫는 순간, 자연이 만든 정원과 공존하는 법을 깨달을 수 있으리라. 정원 그 자체를 수용하고, 판단하지 않으며, 계획에 없던 야생화도 자랄 수 있도록 허락하자. 고양이 같은 뜻밖의 방문자를 위해 작은 물그릇을 놓아둔다면, 우리는 기쁘게 인생의 길모퉁이를 마주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작은 1층의 정원의 양귀비처럼 예상치 못한 만남을 마주하며 설레일 것이다. 또한 10년간 함께 한 향소국처럼 장소와 시간에 따라 변화하는 유연한 힘을 닮아갈 수 있으리라. 이 모든 깨달음을 안아줄 수 있다면, 정원은 나만의 공간이 되리라. 그리고 정원사는 자연과 마주하고, 그 울림을 비로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삶은 정원처럼 매일 조금씩 가꾸는 것이다.
ps. 뚱냥이도 보고 싶었다냥?
오랜만이다냥. 정원사가 내 이야기도 써준다더니, 분량상 뒷모습만 보여줬다냥. 흥이다냥. 다음 주엔 내 분량 꼭 챙기겠다냥. 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