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P정원사의 무계획 정원개척기
정원은 마음의 성찰이자,
내면의 평화로 가는 길이다
(헤르만 헤세)
“저, 이 집으로 계약하겠습니다!”
처음부터 이사를 원한 것은 아니었다. 아이가 태어나고 자란 집은 16층이었다. 점점 크면서 베란다 창들에서 바깥을 보고 싶어 했다. 위험한데 싶어 환기도 못 시키는 날들이 이어졌다. 8년간 살았던 집, 그 ‘집을 떠날 결심’은 녹록하지 않았다. 언젠가는 일층으로 이사를 가야겠다 마음을 먹었다. 위험하기도 하고 '뛰지 마‘란 말도 그만하고 싶었으니까.
이제야 사심을 고백한다면 1층이라면 정원이 있는 집을 꿈꾸었다. 조건도 제법 따졌다. 확장 안 한 집, 해가 잘 드는 남향, 시야도 뚫리면서도 조금 사생활도 보호할 수 있고, 또, 마당이 조금이라도 있었음 했다. 설마 그런 집을 만날 수 있겠나 싶었지만, 그래도 꿈꾸는 것은 즐겁지 않은가? 당장 이사 계획이 없었음에도 늘 부동산 앱을 몰래 뒤적거렸다. 1층인데 야외정원이 있는 아파트의 매물을 몇군데 적어두었다. 늘 염두에 두고 작은 꿈을 꾸었다. '아, 햇살이 그래로 쭉 비치는 곳에서 흙을 밟고 땅에 꽃을 심고 싶다. 거기서 테이블도 놓고 커피 한잔 마시면 더 좋겠지?'
아이가 학교를 전학하면서 원래 살던 동네에서 편도 20분씩 운전해서 학교를 보내야했다. 그냥 다닐 수 있었지만 그러기엔 오고 가는 길이 너무 길어졌다. 그래서 1층이란 조건을 달고 집을 알아보았다. 처음 이 집을 보러 갔을 때 창문 밖을 보이는 풍경이 모두 초록빛이라 내 마음에 쏙 들었다. 그런데 마당이 있네! 나무 뷰인데 마당도 있다고? 이 집은 나를 위한 작은 선물처럼 느껴졌다. 우리에게 새로운 시작을 약속해 주는 듯했다. 고층의 베란다정원에서 지상으로 내려가고 싶은 오랜 바람이 날 움직였다. 그래, 계약하자!
잡초를 제거하는 것은
정원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뿐만 아니라,
우리 삶을 정돈하는 일이다.
학교적응은 쉽지 않았다. 그래서 전학 온 첫 달은 2시간씩 등교하다가 이제 막 3시간 등교를 하게 될 때 쯤, 이사갈 집의 공사를 시작했다. 당시 나는 아이를 등교시키고 차로 20분 거리의 집으로 가서 쉬기엔 내 마음이 놓이질 않았다. 쉽지 않은 하루하루의 연속이었다. 혹여나 도움반 선생님에게 전화 오면 당장 달려 나가야만 할 것 같아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기다리는 동안 할 일이 필요했다. 그러다 문득 공사 시작한 날 처음으로 본 마당 안의 잡초가 생각났다. 무슨 잡초가 1미터 키를 훌쩍 넘었었잖아. 정글인가, 10년 동안 손보지 않은 정원. 고양이 한 마리가 지나다녔던 정원. 그래, 잡초 정리나 하자. 등교하고 1-2시간씩 공사현장 확인도 할 겸 매일 정원을 손보기 시작했다.
모든 작업에는 비용이 따른다. 직접 손으로 하는 일은 경제적일 뿐만 아니라, 공간에 대한 애착과 더 깊은 이해를 만들어낸다. 정원은 단순히 흙과 풀과 꽃으로 이루어진 공간이 아니다. 정원은 내 손으로 하나하나 일궈낸 나만의 작은 세계였다. 처음에는 무작정 제초가위를 사서 허리까지 오는 잡초를 손에 쥐고 잘라냈다. 일단 저 무성한 잡초의 숲 사이로 무엇이 있는지 확인해 보고 싶었다. 땀이 눈이 매울 정도로 쏟아졌다. 그러나 잡초를 베어낼 때마다 그동안 쌓였던 나의 불안과 두려움도 함께 잘려나갔다. 그리고 아무도 관심 없어도 씩씩하게 자란 노란 백합을 발견했다. 마치 나를 격려해주는 듯 피어 있었다. “괜찮아, 힘을 내봐!“
이틀을 꼬박 구슬땀을 흘리고 나서야 잡초를 제거할 수 있었다. 발견한 것은 보물이 아니라 쓰레기, 그간의 누적된 무심함이었다. 버려진 노란 박스는 벌레들의 소굴이었고, 위집에서 버린 아이스크림 봉지, 테이크아웃커피컵, 담배꽁초들이 잔뜩 있었다. 그 아래에는 10년 전, 이곳을 가꾸다 떠난 집주인의 흔적들도 있었다. 버려진 난화분과 폐화분, 깨진 받침대. 모두 손수 꺼내고 모았다. 모은 쓰레기는 인테리어 폐기물 버리는 날 같이 다 버렸다. 내 손 닿는 데까지만. 쓰레기를 버리고 나니, 이번엔 벌레가 문제였다. 하루는 ‘땅벌레 뚝’이란 제충제를 갖고 와서 골고루 뿌렸다. 그리고 이틀 뒤에는 천연제초제를 또 잔뜩 뿌렸다. 집에서 물조리개에 물을 담아 와서 타서 뿌렸다. 그러기를 두어 번 반복.
이제야 마당이 가꾸지 않은 본래 모습을 드러낸다. 제법 땅이 넓었다. 잡초를 뽑고, 버려진 것들을 치우니, 아주 말쑥해졌다. 여백을 채울 기대감에 마음이 두근거렸다.
뜨거운 여름의 초입, 안은 뚝딱거리고, 나는 바깥에서 나만의 아지트를 마련했다. 인테리어 공사가 끝나자, 장마가 시작되었다. 정원 정비도 이사를 앞두고 휴지기를 맞이했다. 이제 정원은 새로운 시작을 준비 중이다. 이제 비가 그치면 한여름이 오고 새로운 정원의 여정이 시작될 것이다. 나는 여기서 씨를 뿌리고 꽃을 심고 나무를 심으리라. 흙을 덮고 낙엽을 모을 것이다. 그리고 다시 작은 변화가 켜켜히 쌓여 새로운 봄을 맞이하리라.
예고편_
정원은 정원사의 손길이 가는 만큼 변화한답니다. 이번편은 정원을 만들기 위한 기초 작업이라면, 다음 글은 꽃도 심고 자갈도 깔고 또 잡초제거도 하는 이야기에요. 매일 같은 듯 다른 듯, 오롯이 가꾼 자만이 아는 작은 설레임이 있답니다. 그럼 다음 편에서 뵈어요.
photo by 인생정원사